한국일보

‘레거시 미디어’ 마저 ‘헛소리’에 흔들려서야…

2025-03-27 (목) 12:00:00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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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헌문란과 계엄법 위반 등으로 탄핵 소추된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심판선고가 임박했다. 내란 방조 등 5가지 사유로 탄핵 소추됐던 한덕수 국무총리에 대해 24일 기각 판결을 내린 헌재는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심판선고를 위한 마지막 숙고를 거듭하고 있다. 이번 주말 혹은 다음 달 초 선고가 나오면 탄핵소추가 된지 무려 100여일 만에 헌재의 판단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 사이 나라는 윤석열의 탄핵을 둘러싼 진영 간의 찬반 대립과 충돌로 준전시상태 를 방불케 하는 혼란이 이어져왔다. 그런 가운데 무수한 국민들은 불안증과 불면증을 호소하는 등 이른바 ‘내란성 증후군’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또 경제는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헌재의 판결 지연에 따른 사회적 비용과 경제적 손실은 그 규모를 정확히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지난해 12월3일 밤 윤석열이 취했던 행동과 조치가 헌법에 부합하는 것이었는지에 대한 판단은 사실관계들이 너무나도 명확하기 때문에 전혀 어려운 게 아니다. 이념이나 가치관이 개입할 만한 사안이 전혀 아니다. 그럼에도 헌재의 판단은 계속 늦춰졌다. 어떤 판결을 내리든 극렬한 반발과 저항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이를 최소화하기 위한 논리를 찾기 위해 고민하는 것 아닐까 추측해 보지만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사실 윤석열의 비상계엄은 극우적인 망상에 사로잡힌 대통령이 일으킨 어처구니없는 폭거였다. ‘부정선거 의혹’등 그가 계엄관련 담화와 헌재에서의 자기변론을 통해 늘어놓은 궤변들 속에는 현실과 동떨어진 그의 인식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계엄 실패 후 윤석열이 담화를 통해 이치에 맞지 않는 말들을 계속 늘어놓자 한 보수신문은 “그가 사로잡혀 있는 망상의 끝이 과연 어디인지 다시 한 번 고개를 젓게 만든다”고 개탄했다.

평소 윤석열이 가짜뉴스와 음모론 콘텐츠가 횡행하는 극우 유튜브에 빠져 산다는 관측은 오래전부터 제기돼 왔다. 상당수 극우 유튜버들을 정부요직에 기용한 것과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음모론적인 생각을 드러냈다는 전언 등 근거는 넘쳐났다. 극우 유튜버들은 대통령의 세계관을 지배하고, 대통령은 권력을 통해 이들의 뒷배가 돼주는 악순환의 구조 속에서 극우 망상공동체는 몸집과 세를 키워왔다. 윤석열이 일으킨 내란과 그 이후 지속돼 온 극심한 혼란은 바로 이런 병리적 현상의 후과이다.

트럼프가 당선된 지난 2016년 영국 옥스퍼드 사전은 그해의 단어로 ‘탈진실’(post-truth)을 골랐다. SNS가 가짜 뉴스들로 뒤덮이고 진실과 허위가 뒤섞인 가운데 트럼프가 승리하면서 세계가 충격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후 8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탈진실’은 점차 일상이 돼버렸다. ‘거짓말’의 단계를 넘어선, 망상에서 비롯된 어처구니없는 주장들이 진실과 사실 행세를 하려들고 있다.

여러 건의 굵직한 탐사보도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영국의 대표적 저널리스트 제임스 볼은 이것을 ‘Bullshit’(헛소리, 개소리)이라 지칭한다. ‘거짓말’이 진실과 권위를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교묘하게 전략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헛소리’는 이런 것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마구 내뱉는 허구의 담론이다. 최근 극우 망상 공동체 안에서 확산된 “트럼프가 윤석열 대통령을 구하러 올 것”이라는 ‘트럼프 메시아론’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디지털 변혁의 시대에 전통언론을 의미하는 ‘레거시 미디어’(legacy media)는 온갖 거짓말과 헛소리들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뉴스소비자들이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길잡이가 돼 주어야 한다. 하지만 레거시 미디어가 과연 이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제임스 볼은 “주요 매체들 없이 이런 헛소리들이 뜨기는 어렵다”고 지적한다. 레거시 미디어가 오히려 헛소리의 확산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헛소리와 거짓말을 걸러내는 거름망 혹은 게이트키퍼의 구실을 해야 하는데도 ‘의견’이란 명분으로 헛소리들을 그대로 나열 보도해 해줌으로써(이른바 ‘따옴표’ 보도) 이것을 포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아예 주체적으로 거짓과 망상의 씨앗을 뿌려대는 일부 레거시 미디어도 있다. 폭스뉴스가 대표적이다. 2020년 대선 후 폭스뉴스는 트럼프의 대선사기 주장을 퍼뜨리며 개표기 조작 가능성을 집중보도했다. 결국 거짓보도의 대가로 폭스뉴스는 투·개표기 업체에 7억 달러가 넘는 배상금을 물어주라는 판결을 받았다.

정통언론을 표방하는 ‘레거시 미디어’들이 교묘한 편집과 왜곡을 통해 본질을 흐리고 비트는 유사 가짜뉴스들을 퍼뜨려온 것을 우리는 계속 봐왔다. 이런 뉴스에 휘둘린 유권자들이 뽑는 대통령은 함량미달일 확률이 높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른 대가는 유권자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게 된다.

너무 교과서적인 얘기 같지만 ‘레거시 미디어’를 위시한 언론의 존재이유는 진실을 추구하고 이를 알리는 데 있다. 진실과 사실의 가치를 어느 때보다도 무겁게 받아 들여야 할 엄중한 시기를 지금 우리는 지나고 있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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