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인사회 민권운동 대부…“큰 별 졌다” 추모

2023-06-02 (금) 하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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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희식 초대 LA총영사 차남, 1948년 도미

▶ 가주 한인 3번째 변호사… 법조계 큰어른, LA폭동 후 한인 권익보호·후세 양성 앞장

1일 별세한 고 민병수 변호사는 한인 커뮤니티 구성의 초창기인 1960년대부터 다양한 한인단체들에서 활동하며 커뮤니티의 발전과 권익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해 온 한인사회 민권 운동의 대부로 불린다. 민희식 초대 LA 총영사의 아들로, 부친을 따라 미국에 건너온 한인 1.5세 이민자였던 고인은 70년대 법조계에 입문한 올드타이머 변호사이면서 남가주한인변호사협회(KABA)를 설립했고 한인청소년센터(KYCC) 이사, 미주한인재단 회장 등을 역임하는 등 한인 커뮤니티의 기둥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또 이민사 보존과 발굴, 그리고 후세들에게 역사를 심어주기 위해 발로 뛰는 활동을 활발히 펼친 한인사회의 큰 어른이기도 했다. 특히, 4·29폭동과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 소녀상 건립, 한인타운 선거구 재조정 등 한인사회가 난관에 부딪혔을 때마다 앞장서‘봉사’의 참뜻을 몸소 후세들에게 가르쳐준 큰 스승으로 추앙받았다.“한인사회 위해 일하는 게 가장 기쁨”이라고 누누히 강조하던 고 민병수 변호사의 별세 소식에 남가주 한인사회는 “큰 별이 졌다”며 한 목소리로 추모하고 있다.

고인은 1933년 서울에서 태어나 중학교 3학년이었던 1948년 LA총영사관이 처음 설치되면서 첫 총영사로 임명된 부친을 따라 미국에 건너왔다. 그 당시 LA에는 이민자와 자녀를 합쳐 한인 인구가 1,000명이 안돼 차별과 경제적 고통을 이겨나가야 했다.

1960년 포모나의 기독 사립대학인 라번 유니버시티를 졸업했지만 당시 차별적 정서로는 아시안 학생의 법대 입학이 거의 불가능했다. 웨스트코비나 통합교육구에서 15년간 교사로 일하며 꿈을 접지 않았던 그는 1975년 마침내 주경야독으로 캘리포니아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백학준 판사, 장병조 판사에 이어 캘리포니아주에서 3번째 한인 변호사가 된 순간이었다. 형법 변호사가 된 뒤 1992년 LA 폭동이 발발했고 이를 계기로 고인은 한인사회의 권익보호에 더욱 크게 눈을 뜨게 되었다.

폭동 이후 11명의 변호사들과 함께 한인법률권익재단(KALAF)을 만들고 사재와 시간을 털어 리커 업주들을 대변해 LA시를 상대로 불합리한 조건부영업제한(CUP) 조치에 대한 소송을 진행했다. 2년이 걸린 소송에서 대부분의 원고는 다 빠져나갔지만 결국 남아있던 3명의 원고는 승리를 하고 보상금을 지급받았다.

“고객의 80%가 한인이었다”는 그는 어려운 한인들을 위해 “적당히 내가 굶지 않을 선에서 수수료를 받지 않기도 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민 100주년 ‘코리안-아메리칸 데이’ 위원장을 지내며 LA시와 가주에서 ‘미주 한인의 날’을 제정하는데 앞장서기도 한 그는 특히 1.5세, 2세들과 함께 일을 하는 것에 큰 보람을 느꼈다.

1960년대 2세들로 구성된 당시의 한인회(AKCO)를 시작으로, 1976~1985년 한인타운 청소년회관(KYCC) 이사로 활동했다. 1980~1989년 LA카운티 사법자문그룹 자문위원을 역임했고 1983년부터 ‘법의 날’ 행사를 주관해왔다. 또, 1997년부터 한미연합회(KAC) 이사장 및 이사를 역임했으며 2000년부터 한인장학재단 이사로 활동했다.

올드타이머 1.5세로서 이민 1세들과 일해왔던 고인은 지난 2003년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이 끝나고 커뮤니티에 봉사정신과 애정을 가진 1.5세, 2세들을 만나게 되면서 그의 삶의 지표도 더욱 발전적인 방향으로 변했다고 한다.

특히 찰스 H. 김 초등학교의 명명 작업을 추진하면서 한인 후세들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깨달았다는 고인은 1.5세와 2세들과 더불어 17개 타인종 커뮤니티 및 단체들을 제치고 찰스 H. 김이 학교명으로 선정되도록 치밀한 준비와 전략을 준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4년 ‘미주 한인의 날’ 제정 추진위원장을 맡아 ‘미주 한인의 날’ 제정에 총력을 기울였고 한인타운 찰스 H. 김 초등학교(2006), 김영옥 중학교(2009), 새미 리 초등학교(2013) 이름 명명에 앞장선 것도 이 때문이다.


고인은 “1.5세, 2세들은 순수하면서도 유능하고 특히 커뮤니티에 대한 애정이 많다”면서 “이를 1세가 인정하고 도와주면 큰일을 할 수 있고, 이들과 일하는 것이 요즘 내가 사는 기쁨 중 하나다”라고 말하곤 했다. 또, 일년에 수백명씩 쏟아져 나오는 후배 변호사들에 대해 “인구에 비례해 1.5세와 1세가 이렇게 많이 진출한 것은 한인 커뮤니티밖에 없다”면서“변호사가 많아지면 문제가 있을 때 법적으로 이를 대변할 인력이 많다는 뜻”이라며 긍정적인 시각도 보이며 차세대 젊은이들에게 나침반이 되어왔다.

2000년과 2005년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 및 공로상 수상했고 2009년 재미동포 첫 대한민국 법률대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2010년 세계한인교육자총연합회(IKEN) 초대회장, 2013년 애국동지회 고문을 역임했으며 2018년 세계한인검사협회 주최 평생공로상(2018년), 남가주한인변호사협회 주최 개척자상(2018년) 등을 수상했다.

고 민병수 변호사의 별세 소식에 한인사회에서는 추모의 물결이 일고 있다. LA 한인회는 1일 성명을 통해 “민병수 변호사는 한인사회가 어려울 때마다 앞장 서시며 ‘봉사’가 무엇인지 몸소 후세들에게 가르쳐 주신 우리시대 큰 스승이셨다”고 애도했다.

■고 민병수 변호사 주요 연보

▲1933년 한국 서울 출생
▲1948년 15세때 도미
▲1960년 라번대학 졸업, 교사로 15년 근무
▲1975년 캘리포니아주 변호사시험 합격
▲1976~1985년 한인타운청소년회관(KYCC) 이사
▲1980~1989년 LA 카운티 사법자문위원
▲1985년 커뮤니티공로상 (LA 센트럴 라이온스클럽)
▲1990년 키와니스클럽 커뮤니티 공헌상
▲1996·2005년 한미변호사협회 공로상
▲1997년 인권공로상(멜빈 존스 펠로우)
▲2000·2005년 한국 대통령 공로상
▲2004년 미주한인의날 제정 추진위원장
▲2006년 남가주 미주한인재단 회장
▲1983~2023년 ‘법의 날’ 행사 주관
▲1997~2023년 한미연합회(KAC) 이사
▲2000~2023년 한인장학재단 이사

<하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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