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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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와 쓰기, 그게 뭐라고

2023-05-26 (금) 안미정 / 테이크루트 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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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한글학교 숙제를 읽어보다가 괴발개발 써놓은 아이의 글씨를 발견했다.

“아니 글씨를 이렇게 써놓으면 어떻게 해? 알아볼 수가 없네.”

“나는 다 알아볼 수 있어. 괜찮아.”


아이의 대답에 기가 막혔다. 언어의 전제조건은 소통이 아니었던가? 네가 쓴 것을 내가 못 읽겠다는데 괜찮다니! 하나하나 일일이 고쳐주고 싶었지만 마음에만 담아 두고 일단 멈췄다. 그 일이 있고 며칠 뒤, 우리 가족은 유럽 여행을 떠났다. 로마 공항에서부터 시작된 낯선 언어들의 향연에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커다란 수화물을 네 개나 챙겨 들고 입구와 출구를 혼동하여 몇 차례 같은 길목에서 오가던 중 내가 불평했다.

“아니 똑바로 써있는 글씨를 보는데도 하나도 못 알아듣겠네.”

“나는 쫌 알 것 같은데. ?i treni는 To trains고 Usita가 Exit 아니야?”

나는 알아보지 못한 것을 아이는 말랑말랑한 사고로 해석해냈다. 심지어 이탈리아어를 실감 나게 잘 읽는다! 공항에서 내려 기차로 갈아타는 과정 중 아이는 안내방송을 귀담아듣고, 표지판을 읽고 또 읽으며 자신만의 답을 찾은 것이다. 반면에 나는 어땠나? 손에 쥔 핸드폰 속 지도만을 맹신하며 내 주변에 수놓아진 길 찾기 단서들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다.

지난 3월 재미 저널리스트 안희경 님과 인터뷰하며 ‘시나브로’라는 말을 처음 듣게 되었었다.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이라는 뜻의 순우리말로 당시의 나는 ‘시나브로 무언가를 배우고 익힐 수 있는 환경을 백분 활용하자’는 다짐했었다. 그런데 나 좀 보소. 시나브로 이탈리아어를 배울 수 있는 환경에 두 발을 딛고 서 있으면서도 낯선 불편함에 배움의 기회를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이의 모국어 습득 과정 중 읽기와 쓰기는 듣기와 말하기 다음에 등장한다. 어린이는 신체가 자라는 속도에 맞는 방법으로 언어를 습득하기 때문이다. 듣기와 말하기를 우선시하는 이 방법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지만 시나브로 익힐 수 있고 체화된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신체가 다 자라 빠른 습득을 목적으로 하는 성인의 언어습득은 읽기와 쓰기를 우선시한다. 이 방법은 빠르게 배운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는 장점 이외에는 특이점이 없다. 시나브로 익힌 모국어가 너무 익숙해서 그것을 몰랐던 적이 없던 때를 기억 못 하는 내가 자라나는 아이에게 읽기와 쓰기에 대해 훈계를 두는 것이 맞는 걸까? 아차 싶었던 마음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안미정 / 테이크루트 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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