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김광덕 칼럼] ‘정크 정치’와 리크루팅 실패

2023-05-25 (목) 김광덕 서울경제 논설실장·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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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 사기로 수많은 서민들이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는데 국회에서 썩고 있는 전세 관련 법안이 십수 건이다. 피가 거꾸로 솟는다.”

한 지인이 며칠 전 정치권에 대한 분노를 담은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는 존 로크의 ‘통치론’을 읽고 있다면서 “국민이 위임한 입법권의 방치”라고 꼬집었다. 국회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뒤인 27일 ‘전세 사기 대책법’ 중 일부를 통과시켰다. 이런 법안들이 일찍 처리됐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는 점에서 국회의 직무 유기에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여야는 해야 할 일을 내팽개치고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밀어붙였다.

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경제 살리기 법안도 방치해왔다. 그 대신에 총선 표심을 잡기 위한 포퓰리즘 입법 폭주만 하고 있다. ‘웰빙’ 체질을 버리지 못한 여당인 국민의힘도 산으로 가고 있다. 노동·연금·교육 등 3대 개혁을 뒷받침하지 못하고 선심 정책 법안을 놓고 야당과 담합하기도 했다.


국회가 역주행하는 것은 여야 의원들의 자질과 자세, 실력이 수준 미달이기 때문이다. 역대 국회를 비교하면 21대 국회의 역량이 최악이다. 여야 정당 지도부의 리더십은 바닥 밑으로 추락했다. 민주당 지도부는 정부에 대한 건전한 비판과 대안 제시 등 제1야당 본연의 임무를 방기하고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 덮기와 국정 발목 잡기에만 골몰해왔다. 게다가 민주당 지도부는 조국 사태와 ‘이재명 방탄’, 송영길 전 대표 선출 과정의 ‘돈 봉투’ 의혹과 관련해 반성과 부끄러움을 모르는 몰염치 행태를 보였다. 정청래(3선)·고민정(초선)·박찬대(재선)·서영교(3선)·장경태(초선) 최고위원 가운데 과연 미래 비전을 가진 정치인을 꼽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국민의힘 지도부의 행태도 오십보백보이다. ‘윤심(尹心)’을 업고 선출된 김기현 대표는 최근 ‘증발된 대표’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존재감을 상실했다. 여당의 ‘실종 대표’와 야당의 ‘방탄 대표’ 대결이 됐다. 대표 경선 과정에서 대통령실이 순차적으로 나경원 전 의원과 안철수 의원 때리기에 나선 것은 윤석열 정부가 내세우는 ‘자유’의 가치와 인적 자산을 훼손시켰다. 여당의 김재원(전 의원)·태영호(초선)·조수진(초선) 최고위원 등은 ‘말실수 경쟁’을 벌이듯이 잇따라 설화를 일으켰다.

여야 지도부 리크루팅 실패와 극성 팬덤 정치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들이다. 국민의힘이 100% 당원 지지도로 지도부를 선출하도록 경선 룰을 변경하는 바람에 윤심뿐 아니라 극단 세력의 입김이 너무 세졌다. 강성 당원과 우파 성향 유튜브, 전광훈 목사 세력의 과도한 영향력에 휘둘리게 됐다. 민주당에서는 이 대표의 극성 지지층인 ‘개딸’들과 ‘돈 봉투’가 경선 판도를 좌우하게 된다. 개딸들은 쓴소리를 하는 당내 인사를 겨냥해 겉과 속이 다른 ‘수박’이라고 비난하면서 ‘문자 폭탄’ 공세를 가한다. 모두 민주주의의 적들이다.

20대 국회까지만 해도 합리적 리더십을 가진 중진 의원들이 당 지도부로 뽑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요즘에는 극단적 진영 논리를 앞세워 거친 말로 선동해야 당내 경선에서 바람을 일으킨다. 당 지도부에 헤비급·미들급 대신에 플라이급 인사들이 많이 포진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들은 원색적 표현으로 정치 양극화와 국론 분열을 부추긴다. 이러니 한국 정치가 3류·4류를 넘어 ‘정크 정치’ ‘스팸 정치’로 전락했다는 비아냥을 듣는 것이다.

정치를 복원하려면 리크루팅 시스템 개혁이 절실하다. 당 지도부를 뽑는 경선에서는 여론조사 등을 통해 민심을 최소한 30% 이상 적용해 양 극단의 목소리를 걸러내야 한다. 국회의원 공천 심사 과정에서는 민심을 50% 이상 반영해야 한다.

부득이 전략 공천을 할 경우에는 각계 인사로 공정한 심사위원회를 꾸려 후보를 선택해야 한다. 무엇보다 국회와 당의 리더를 고르는 기준을 재설정해야 할 것이다. 지도자는 실력과 도덕성, 용기·소통·설득의 리더십을 갖춰야 한다. ‘친윤’ ‘친명’에 눈이 먼 공천을 접고 ‘미래’와 ‘경제’에 초점을 맞춰 새 피를 수혈해야 승산이 있다. 1년 앞으로 다가온 4·10 총선은 결국 사람 싸움이다.

<김광덕 서울경제 논설실장·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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