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많은 원리와 원칙이 있다. 그 원리와 원칙은 모든 세상의 구조와 질서를 세워주는 기초가 되었고, 특별히 학문적 원리는 모든 문화와 문명의 큰 기둥이 되었다. 그런 학문적이며 사회윤리적 원리와는 다르게 우리 삶에서 깨닫는 원리가 있다. 그 원리가 1:10의 원리이다. 이 1:10의 원리가 모든 상황에 완전히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원리와 법칙에는 예외가 있기 때문이다. 그 원리의 하나는 하나를 알면 열 개를 깨우치는 원리이다. 하나를 가르쳐 주는데 10개를 깨닫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영리한 사람이다. 낫을 놓고도 기역자를 모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그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던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세상을 보다 더 편하고 아름답게 만들게 된다.
착하게 살고, 정직하게 살고, 부지런하게 살라고 어렸을 때부터 배운 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은 단순한 하나의 원리만을 가지고 10개의 삶의 풍요를 이루게 된다. 미국에 이민자로 살아가면서 10개를 다 알지 못하지만 오직 하나만을 알고 하나만을 배워 그것을 붙들고 살아온 경우가 많이 있다. 비록 힘들고 고된 시간들이었지만 그 하나가 지금의 열을 누릴 수 있게 한 것이다.
살면서 많은 것들을 알고 많을 것들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많은 것들을 다 소화하지 못한다면 하나를 제대로 알고 실천하는 것보다 못한 것이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한 가지의 것이 열 가지의 정신적 육체적인 풍요를 누리게 한다면 그 사람은 1:10의 원리를 이루는 사람이다.
1:10의 또 하나의 원리는 그 사람의 하나를 보면 그 사람의 열 개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의 하나의 행동을 보고 열 개의 행동을 다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과나무 하나에서 하나의 사과를 보면 그 나무에 달린 사과의 전체를 볼 수 있듯이 사람의 행동의 열매도 그렇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명문학교, 명문가정, 명문팀을 말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나무 중에 어떤 사과는 다른 사과보다 더 달콤하고 향기롭고 싱싱한 사과가 생길 수 있다. 하지만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말처럼 그 나물이 있으면 그 밥에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한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태복음7:17-18)
몇 년 전 영화 대사가운데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라는 질문속에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아버지의 하는 일이 자식이 하는 일과 일치한다는 선입관이 담겨있는 대사이다. 이런 법칙은 약간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하나로 열 개를 다 포함시키는 오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때 반에서 물건이 없어지는 사건이 생겼는데 아이들이 다 어떤 아이를 의심했었다. 그 아이는 부모없이 어느 기관에서 성장하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아이는 그 물건이 없어지는 일과 관계가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양을 치는 소년이 심심해서 마을 사람들을 놀려 주려고 늑대가 나타났다고 소리를 지르면서 마을로 뛰어 내려갔다. 한 두 번은 마을 사람들이 놀라서 그 소년의 말을 믿어 주었다. 하지만 계속 되는 거짓된 소리에는 귀를 기울여 주지않았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겪고 있는 비극이다. 믿고 싶어도 믿을 수없을 때, 도와 주려고 해도 도와 주지 못할 만큼 갈등이 생길 때가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1:10의 원리를 잘 지켜나가야 한다. 1이라는 숫자가 10의 크레딧을 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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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수 목사 / 워싱턴 동산교회/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