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집단의식 속에 가장 큰 상흔으로 남아 있는 국가적 재난은 무엇일까. 아마도 임진왜란이 아닐까.
이 전쟁 결과, 수많은 조선인이 포로로 끌려가 노예시장에 팔려가는 등 인적 피해만 수 백 만이 넘는다. 경작지의 2/3 이상이 황폐화 돼 경제는 엉망이 됐다. 경복궁과 창덕궁 등 2개의 궁궐이 불타는 등 엄청난 문화재가 소실됐다.
그 응어리가 400년이 지난 오늘에도 남아 있어서인가. 왜적(倭敵)을 소탕하는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다룬 영화가 나왔다 하면 수 백 만이 넘는 관객은 쉽게 동원된다.
1592년 4월 왜군의 부산포 침입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1598년 12월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퇴각하는 적의 대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사실상 막을 내린다.
조선은 그러면 임진왜란 후 일본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대하며 내내 국교를 단절했을까. 아니, 생각보다 일찍 조선과 일본의 수교재개가 시작된다.
전쟁이 끝난 직후인 1599년 3월 대마도주가 사자로 조선에 파견된 것이 그 시작이다. 1600년 8월에 조선에 와 있던 명나라군도 철수하고 같은 해 일본에서는 세키가하라 전쟁 승리와 함께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서면서 조^일 양측은 모두 적극적인 자세로 교섭을 진척시켜 간다.
강화교섭의 전제로 조선 조정은 2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일본 국왕(도쿠가와 막부)의 명의로 공식서한을 보낼 것과 임진왜란 중 한양에서 왕릉을 훼손한 범인을 붙잡아 보낼 것 등이다.
생각보다 일본의. 더 정확히 말하면 대마도주의 회신은 빨랐다. 그리고 얼마 안가 국서의 초안이 도착하고 곧이어 대마도인 2명이 압송되어 왔다.
국서도 그렇고, 왕릉 훼손 범인도 가짜였다. 그걸 조선 조정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냥 묻어두기로 결정했다. 비록 일본의 요청으로 시작되긴 했지만 어렵게 찾아온 기회를 날릴 필요가 없다는 현실적 판단에서였다.
전후 경제복구가 시급했다. 대마도의 사정은 더 급했다. 조선침공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대마도는 전쟁패배로 경제기반이 초토화 됐다. 기아사태에 직면해 있었던 것. 그런 그들에게는 조선과의 무역만이 살 길이었던 것이다.
조선도 민생문제가 심각했지만 일본의 새 정부인 도쿠가와 막부와 수교를 서두른 근본적 이유는 따로 있었다. 조선을 둘러싼 안보환경이 급격히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경 북쪽에서 여진족(후금)의 동태가 불온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북과 남, 양면 전선에서 전쟁은 감당 할 수 없다. 그러니 남쪽 국경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이 끝난 지 10년도 안된 시점인 1606년 일본에 사신단을 파견하고 조총 500자루를 구매했다. 여진족, 후금과의 전쟁에 대비한 무기도입에 나섰던 것이다.
이야기가 길어진 건 다름이 아니다. 기시다 일본 총리가 윤석열 대통령의 방일에 대한 화답으로 한국을 방문, 한일관계, 더나가 한미일 협력관계 강화에 가속이 붙고 있다. 이 정황에 야권일각에서 ‘죽창가’니 ‘토착왜구’ 하는 소리만 여전히 들려와서다.
피일시차일시(彼一時此一時)란 말이 있다. 북한의 핵 위협이 날로 고조되고 있다. 대만해협의 파고는 날로 높아가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동북아가 처한 안보환경이다. 중국의 대만침공 사태가 발발하면 그 불똥은 바로 한반도로, 일본열도로 날라든다.
그런데도 쑤셔대느니 한 세기 전 일본과의 아픈 관계뿐이다. 그러면서 6.25를 ‘항미원조(抗美援朝), 국가수호의 위대한 승리로 버젓이 찬양하는 시진핑의 중국에는 찍소리도 못한다.
저들의 국적은 도대체 어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