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세월호 침몰이나 이태원 압사 같은 대형 사고가 발생하면 국민들의 궐기시위로 정부 존립이 위태로워진다. 경천동지할 비극에 국민이 충격을 받는 건 당연하다. 미국은 전 세계에서 그런 예사롭지 않은 참사가 다반사로 일어나는 유일한 나라지만 국민들의 충격은 그 때 잠시뿐이고 촛불시위도 없고 광화문광장의 추모천막도 없다. 정부도, 의회도 어물쩍 넘어간다.
미국에선 페리 침몰이나 ‘스탬피드’ 압사 아닌 집단총격사건이 평균 6.53일마다 한 건씩 터진다. 지난 해 648건이 발생해 672명이 사망했다. 세월호와 이태원의 총 희생자 수(455명)보다 훨씬 많다. 올 들어서도 111일간 17건이 발생해 88명이 숨졌다. 바로 지난주에도 앨라배마주와 메인주에서 발생한 무차별총격으로 각각 4명씩 숨지고 수십명이 부상을 입었다.
단일 총격사건은 헤아릴 수도 없다. 지난주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에서 16세 흑인소년이 84세 백인노인의 집을 친구 집으로 착각하고 초인종을 눌렀다가 총탄세례를 받았다. 노인은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총격했다. 뉴욕에선 길을 헤매던 20세 처녀가 남의 집 드라이브웨이에서 차를 돌려 나오다가 65세 백인 집주인에게 역시 ‘묻지마’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텍사스에선 여고생 치어리더 2명이 수퍼마켓 주차장에서 자기네 차인 줄 알고 남의 차 문을 열었다가 안에서 나온 25세 히스패닉 청년에게 총격당해 중상을 입었다. 노스캐롤라이나에선 농구공을 가지고 놀던 6세 여아가 이웃집 마당으로 굴러간 공을 주우러 갔다가 집주인인 24세 흑인청년에게 총격당해 뺨에 찰과상을 입었다. 그 아이의 부모도 등과 팔꿈치에 각각 총상을 입었다.
총을 쏜 두 노인과 두 청년은 총격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생명의 위협을 받은 것도, 재산피해를 입은 것도 아니다. 상대방은 모두 여성이거나 미성년자였다. 그냥, 기분 상했다며 상대방의 뺨을 때리는 기분으로 총질을 했다. 그들이 그런 용도를 위해 총기를 구입했을 리 만무하다. 전국 총기협회(NRA)는 총기 소유자들 중 절대다수가 법을 준수하는 선량한 시민이라고 옹호한다.
기분대로 총질한 사람이 엄벌을 받지도 않는다. 거의 40년전 뉴욕 지하철 안에서 승객 버니 괴츠가 5달러를 적선하라며 손 벌리는 10대 4명에게 다짜고짜 총격해 중경상을 입혔다. 한명은 전신마비 장애자가 됐다. 괴츠는 강도당한 경험을 내세워 정당방위라고 주장했고 배심은 이를 받아들여 괴츠를 총기법 위반죄로만 평결했다. 상소법원도 그에게 고작 8개월 징역형을 선고했다.
이윽고 노인, 동양인 건맨들도 등장했다. 올해 음력설날 LA 중국타운 몬터레이 파크의 한 댄스홀에서 72세 베트남 노인의 자동소총 난사로 11명이 숨졌다. 이틀 뒤엔 샌프란시스코 지역 농장에서 67세 중국인 인부가 동료 7명을 사살했다.
미국인들은 해마다 10만여명이 총에 맞고 4만여명이 목숨을 잃는다. 총기위협을 당해봤다는 사람이 5명 중 1명꼴이다. 인구 100명 당 보유총기가 120정에 이른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모두 총을 갖고 있다고 가정하고 조심하는 게 상책이다. 한인노인 73%가 인종차별 해코지가 두려워 밖에서 혼자 걷지 않는다는 조사보고서도 있었다.
미국 성인 71%가 강력한 총기규제법을 요구한다. 총기규제 옹호자가 총기권리 옹호자를 59-35로 앞섰다는 여론조사결과도 있다. 지난 10년간 가장 큰 격차다. 정부가 자동차 운전면허시험처럼 총기소지 자격시험도 치르라는 목소리도 크다. 수정헌법의 개인무장 권리를 전가의 보도로 삼는 NRA가 최근 5년 새 회원을 100만여명이나 잃어 핫바지가 돼간다는 신통한 뉴스도 있다.
팬데믹 기간에 총격사건이 치솟아 규제 목소리가 커졌지만 그래봤자 별 수 없다. 미국인들의 ‘총 사랑병’은 국민 DNA이다. 치료약이 없다. 하긴, 한국인에게도 ‘진영싸움’이라는 국민 DNA가 있다. 나라가 둘로 갈라져 허구한 날 치고받는다. 페리침몰도, 압사사고도 시비 거리다. 미국인들이 총질 않기를 바라는 것이나 한국인들이 진영싸움 않기를 바라는 것이나 모두 공염불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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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춘 전 시애틀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