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였다. 어머니는 장례와 묘지 자리는 당신께서 결정하고 비용을 치르겠다고 했다. 자식들에게 별로 해준 것도 없는데 죽어서 장례까지 폐를 끼칠 수 없다고 말 하셨다.
전쟁 중에 6남매를 둔 어머니에겐 자식들에게 미안한 응어리가 있었다. 전쟁 후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에 아이들을 제대로 입히지도 먹이지도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늘 자식들에게 죄 지은 것처럼 미안하다고 하셨다. 죄가 있다면 가난이다.
어머니와 나는 장례식 절차를 밟고 비용을 치렀다. 이제 남은 것은 묘지 자리였다. 우리는 공동묘지를 찾아 다녔다. 마음에 드는 장소를 찾는데 시간이 걸렸다. 전망도 좋고 양지바른 곳을 찾아 다녔다.
너무 큰 나무 옆은 뿌리가 관을 조른다고 꺼려하셨다. 물가도 피하셨다. 눈이 내리던 겨울 아침 나는 어머니에게 전화했다. 어젯밤 내 꿈에 본 장소를 찾아 가보자고 했다. 눈 덮인 공동묘지의 아침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꿈속의 기억을 더듬어 찾아낸 곳 위에 우리는 섰다. 어머니도 좋다고 하셨다. 우리는 사무실을 찾아 그 자리가 비어 있는지 물었다. 다행히 그 자리는 비어 있었다. 비용을 치르기 전 어머니는 두 사람 분을 사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체구도 작으니 한 사람 몫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 말에 어머니는 “미국남자 옆에 누워 있으면 쑥스러워서...”하시면서 수줍은 듯 말끝을 흐리신다. 미국에 오래 사시고 더구나 미국사위를 둔 어머니의 뜻밖의 대답에 놀랐다. 말이 통하지 않는 미국인들이 얼마나 불편하고 어려웠으면 죽어서까지 그들 곁을 피하려고 하셨을까.
나는 이론을 따져가며 어머니를 설득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머니의 결정이었다. 그대로 받자. 어머니는 또 비석도 미리 사서 세워놓자고 제안하셨다. 그런데 비석 또한 두 사람 사용인 길다란 대리석을 고르셨다.
그 비석에 이름을 쓰겠다고 할 때 비로소 나는 어머니의 숨은 의도를 알아챘다. 비석 한쪽엔 아버지 이름과 생년월일 그리고 사망한 날짜를 적으라고 하셨다. 다른 한쪽엔 어머니의 생년월일과 사망날짜는 비워 두었다. 어디 그 뿐이랴. 혹시라도 영어로 이름이 쓰여 있으면 혼이라도 자신의 무덤을 찾지 못할 수 있으니 영어 이름 밑에 한글로도 새겨 달라고 부탁하셨다.
아버지는 40년전 한국에서 돌아 가셨고 화장을 하고 절에서 49재까지 지냈다. 그날 아침 잊힌 아버지가 다시 등장했다. 삶이 고달프면 어머니는 늘 아버지에게 불평불만을 펴놓으셨다. 착하고 정직한 공무원의 삶은 늘 쪼달렸고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살림을 도왔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 가신 후 어머니는 한 번도 아버지의 얘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우리 기억속에도 아버지는 사라진 지가 오래다. 그날 어머니의 남편은 내가 알고 있던 아버지의 잊혀진 그 사람이 아니었다. 평생을 함께 살아온 남편이며 가장 아끼는 한 인간이었다. 자식들과 살면서 그저 즐겁게 지냈으리라고 생각했던 어머니는 얼마나 남편 없는 외로움을 안고 살았을까.
어머니의 깊은 마음속에 빗장을 걸어 두고 한번도 우리에게 내색을 하지 않았던 어머니를 나는 가볍게 생각했었다. 고생만 시킨 아버지는 잊어 마땅한 것처럼 생각 했었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남편은 너무도 거리가 먼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날 어머니는 드디어 몇 십년 동안 품어 두었던 마음을 풀었다. 혼이라도 옆에 모시고 싶었던 거다. 육신은 먼저 저 세상으로 갔지만 어머니 마음 속에서는 남편을 떠내 보내지 않았다. 한 많은 삶을 사신 한 여인이 남편에게 드리는 애틋한 사랑의 마지막 선물이었다. 지갑에 꼬기꼬기 접어 두었던 돈을 세면서 어머니의 얼굴은 안도와 뿌듯함이 함께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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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순 / 인디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