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큰 미술관들은 거의 대부분 재벌기업가들의 컬렉션을 기초로 설립됐다. 남가주의 게티, 노튼 사이먼, 더 브로드가 그렇고 뉴욕의 휘트니, 구겐하임, 프릭 컬렉션, 휴스턴의 메닐 컬렉션 등이 모두 개인이 평생 수집해온 미술품을 바탕으로 세워졌다.
웨스트우드에 위치한 해머 뮤지엄(Hammer Museum)도 석유재벌 아만드 해머가 설립한 사설미술관이었다. 렘브란트, 루벤스, 르노아르, 티시안, 고흐 등 고전 및 인상주의 그림 100여점과 19세기 판화가 오노레 도미에의 작품 7,500여점을 소장한 해머는 처음에 이 컬렉션을 LA카운티미술관(LACMA)에 기증하기로 약속했었다. 라크마의 오랜 이사였고, 한국미술실이 위치했던 해머 빌딩이 바로 그의 기부로 지어졌을 만큼 많은 기여를 했던 아만드 해머는 그러나 자기 컬렉션의 전시와 관리를 둘러싸고 라크마와 큰 의견차를 보이며 기부를 철회했다.
그리고 곧바로 사설미술관 설립계획을 발표한 그는 윌셔와 웨스트우드의 자사 옥시덴탈 페트롤리움 건물에 딸린 주차장 부지에 3,000만 달러를 들여 3층 규모의 대리석 뮤지엄을 짓기 시작했다. 그때 해머의 나이가 90세, 그의 생전에 완성하려고 서둘러 건축된 미술관은 1990년 개관했고, 해머는 3주후 세상을 떠났다.
당시 라크마와의 불화와 결별은 큰 화제였고 많은 가십을 낳았으나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대중과 미술계를 위해 얼마나 잘된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때 해머 컬렉션이 라크마로 들어갔더라면, 미 서부에서 가장 혁신적인 현대미술의 요람이 된 해머 뮤지엄은 탄생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아만드 해머의 사후 뮤지엄은 운영에 난항을 겪으며 인근 대학 UCLA에 합병을 타진했고 1994년 UCLA 해머미술관으로 새로 출범했다. 여기에 UCLA 소속 라이트 아트갤러리와 그룬월드 그래픽아트센터가 통합되면서 본격적인 뮤지엄의 구색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해머 뮤지엄이 지금의 수준 높은 현대미술관으로 도약하게 된 건 1999년 앤 필빈(Ann Philbin) 관장이 부임하면서부터다. 뉴욕의 드로잉 센터 관장이었던 필빈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던 해머 뮤지엄을 완전히 새롭게 변모시킨 주인공이다. 부임 당시 어둡고 지저분하고 관람객이 거의 찾지 않던 이곳에서 큰 잠재력을 본 그는 공간과 전시내용과 소장품의 방향을 재설정하는 매스터 플랜을 세웠고 지난 24년 동안 차근차근 변형시켰다. 그동안 600만 달러였던 연예산이 2,800만달러로, 35명이었던 직원은 100명으로, 기부금은 3,500만 달러에서 1억2,500만 달러로 크게 늘었고, 4,000점 이상의 현대미술 컬렉션도 소장하게 됐다.
그리고 지난 3월말, 해머 뮤지엄은 숙원이던 미술관 증개축의 완성을 알리는 오프닝 축제를 열었다. 2000년부터 건축가 마이클 말찬(Michael Maltzan)과 함께 뮤지엄 공간을 고치고 늘리고 연결하는 작업을 계속해온 5단계 건축프로젝트가 드디어 윌셔 길 쪽으로 새로운 출입구를 낸 가장 중요한 마지막 공사를 마치고 일반에 공개된 것이다.
과거 해머 뮤지엄은 사방이 막힌 건물이어서 지하주차장을 통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돌아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건물 1층의 벽을 뚫고 문을 내면서 전면 통유리를 통해 밖에서 뮤지엄 내부를 볼 수 있도록 시원하게 리모델링함으로써 대중의 접근성을 한껏 높인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순차적으로 진행돼온 이 뮤지엄 변형 프로젝트에는 총 9,000만 달러가 투입됐는데 새로운 뮤지엄 입구는 이 가운데 3,000만달러를 쾌척한 린다와 스튜어트 레스닉 부부의 이름을 따서 명명(Lynda and Stewart Resnick Cultural Center)됐다. 레스닉 부부는 폼(POM) 주스와 피지 워터, 원더풀 피스타치오와 아몬드, 펠레플로라 컴퍼니를 비롯해 여러 와이너리를 소유한 거대 재벌로, 2010년 완공된 LA카운티뮤지엄(LACMA)의 레스닉 파빌리온도 이들이 기증한 4,500만달러로 지어진 것이다.
큰 경사를 맞아 해머 뮤지엄은 지금 대단히 멋지고 특별한 전시들을 선보이고 있다. 우선 로비에 들어서면 입구부터 계단 위까지 빨간 색실을 정교하게 얽어서 연결한 치하루 시오타의 설치작품 ‘네트웍’이 방문자를 압도한다. 작가와 UCLA학생들이 3주 동안 800파운드의 실뭉치를 감고 돌리고 묶어서 만든 이 작품은 무한히 뻗어나가는 미세한 실핏줄 같기도 하고 컴퓨터 네트웍 같기도 하며 복잡하게 연결된 글로벌 세계 혹은 인간관계를 상징하기도 한다.
로비 옆에 새로 만든 1층 갤러리는 과거 은행이었던 5,600 스케어피트의 넓은 공간을 복원한 전시장인데 여기서는 ‘미립자들’(Particulates)이라는 리타 맥브라이드의 레이저 설치작품을 볼 수 있다.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나옴직한 초록색 레이저광선들이 검은 벽을 배경으로 기하학적 패턴을 쏘아대며 빛과 공간의 시간여행을 시험하는 작품이다. 거기서 건물 밖으로 나오면 윌셔와 글렌든 코너에 25피트 높이의 ‘오라클’이 서있다. LA작가 샌포드 비거스의 청동 조각상으로 록펠러센터에서 장기 대여해온 작품이다.
가장 볼만한 전시는 3층에서 열리고 있는 소장전(Together in Time: Selections from the Hammer Contemporary Collection)이다. 해머 컬렉션 중에서 엄선한 70여점이 드넓은 전시장에 여유 있게 걸려있는데 하나하나가 발길을 멈추게 하는 수작들이다.
해머 뮤지엄은 한인 커뮤니티에서는 좀 떨어져있지만 ‘진짜’ 현대미술이 궁금한 사람은 반드시 둘러봐야 할 곳이다. 컨템포러리 화단의 혁신적인 작가들이 만드는 따끈따끈한 예술을 연중 무료로 볼 수 있고, 거의 매일 다양한 주제의 세미나와 강연, 심포지엄, 워크샵, 영화 상영, 음악공연이 열리고 있는 ‘젊은’ 미술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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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