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에는 신들로부터 독특한 형벌을 받은 인물이 등장한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코린트의 왕인 시시포스이다. 대단히 기민한 그는 너무 나서다가 신들의 미움을 샀다. 신들을 수시로 속인 상습적 기만의 죄 그리고 신들과 맞먹으려 든 오만, 휴브리스의 죄를 범했다. 보다 못한 신들은 그에게 겸손을 가르치려고 형벌을 고안해냈다. 매일 무거운 바윗덩이를 언덕 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벌이다. 바위는 정상에 닿는 순간 굴러 떨어지고 그러면 다시 바닥에서부터 밀어 올리기를 한없이 반복해야 하는 벌, 저주이다.
시시포스의 형벌은 인간의 조건에 비유된다. 의미 없는 일을 끝없이 반복해야 하는 삶의 부조리 혹은 존재의 무의미함이다. 실존주의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무의미와 무관심으로 점철된 세상에서 의미와 진실을 찾으려는 인간의 부질없는 노력으로 신화를 해석했다.
한편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노동 자체이다. 매일 눈 뜨면 출근해서 일하고 다음날 눈 뜨면 다시 일하기를 반복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시시포스를 본다. 먹고 살려면 일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데, 한번 일하고 한번 먹으면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 먹어야 하니 일 또한 계속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 우리가 시시포스이다.
일을 원해서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일을 신들의 저주로 생각했다. 기원전 8세기 시인 호머는 인간을 미워하는 신이 앙심을 품고 인간을 고생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비슷한 시기의 시인 헤시오도스는 신이 인간에게 노해서 식량을 땅 밑에 파묻었다며 사람들이 일하지 않고 살았던 황금기로 돌아가기를 갈망했다.
구약성경의 맥락도 비슷하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는 일하지 않았다. 여호와의 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하면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세기 3:17) 라는 벌이 내려졌다.
우리가 일하기 싫어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말해주는 내용들이다. 그러니 어느 출근하기 몹시 싫은 날, 상사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열이 치솟는 날, “이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복권이라도 당첨되어서 이 지겨운 일을 그만둘 수는 없을까” … 생각하는 건 자연스럽다. 은퇴할 때까지만 참자며 버티고 버티는 것이 직장인들의 수십년, 시시포스의 삶이다.
그런데 근년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은퇴연령 한참 지나서까지 일을 계속하는 고령층이 늘고 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의 직장인들은 일찍 은퇴하고 싶어했다. 사무실이나 공장에서 수십년 일하다보면 몸과 마음은 탈진상태, 가능한한 빨리 은퇴하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했다. 근무 스트레스에서 해방돼 해외여행 가고, 크루즈 타며 여생을 즐기는 것이 전형적인 은퇴자들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90년대부터 은퇴를 미루는 추세가 나타났다. 이유는 다양하다. 오래 일할수록 소셜연금이 올라가니 좋고, 이전 세대에 비해 건강과 교육수준이 개선된 영향도 있으며, 일이 과거처럼 육체적으로 고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은퇴자금이 부족해서이기도 하다. 은퇴나이에 일을 계속하는 숫자는 지난 20년 동안 꾸준히 증가, 2022년 65~69세 연령층 중 거의 3분의 1(32%)은 일을 하고 있다. 일이 지겹기만 한 건 아니라는 깨달음, 일이 의외로 건강에 좋다는 인식이 생겨난 덕분이다.
노년의 일과 건강의 상관관계가 획일적이지는 않다. 각자 상황에 따라 다르다. 건강이 좋지 않거나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라면 노년에 맞지 않다. 그런데 건강에 문제가 없고 일의 성격상 심신에 큰 부담이 되지 않을 경우, 오래 일할수록 건강에 좋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일이 동반하는 기본적 이점 때문이다.
첫째 출근하면서 몸을 움직이게 되고, 둘째 업무를 보면서 뇌를 활발하게 유지하게 되며, 셋째 사람들과 어울리며 사회적으로 연결되는 효과들이다. 노년에 특히 중요한 것은 사회적 연결감. 직장동료나 상사가 마음에 안 들어 속을 썩는다 해도 고립보다는 정신건강에 좋다고 한다. 그에 더해 일에 대한 소명의식까지 있다면 금상첨화. 하루하루 목적이 있는 삶을 살면서 생산적이고 행복한 노년이 가능해진다.
오하이오, 클리블랜드의 신경과 전문의인 하워드 터커 의사는 100세로 여전히 일을 하고 있다. 현직의사로 기네스북 최고령기록 보유자이다. 그가 태어났던 1922년 미국의 평균 기대수명은 남성 58세 여성 61세였다. 그는 당시 수명보다 훨씬 긴 75년 이상을 의사로 일하고 있다. 장수와 건강의 비결로 그는 우수한 유전자와 약간의 행운 그리고 은퇴 없는 삶을 꼽는다. 명석하던 사람들이 은퇴 후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지면서 인지능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케이스들을 그는 많이 보았다고 한다.
만약 신들이 시시포스를 사면한다면 그는 해방감에 행복할까. 매일 하던 일이 사라져서 공허하지는 않을까. 근육단련을 위해서라도 가끔씩 바위를 밀어 올리지는 않을까. 원하면 언제든 은퇴할 수 있는 조건에서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은 더 이상 지겹지 않다. 의무도 책임도 없는 노년에 일은 즐거움과 보람의 원천이 될 수 있다. 그만큼 젊음이 유지된다. 일의 재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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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