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바이올린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만든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Antonio Stradivari)가 죽기 전에 두 아들, 오모보노와 프란체스코에게 애써 키운 가업을 넘겨주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두 아들은 아버지가 남긴 위대한 유업을 다 들어먹고 망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두 아들이 아버지가 남긴 기술을 모방하고 베끼기에만 급급했지 더 이상의 경지를 이루려는 창의적 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거인의 어깨 위에서 겸손하게 새 출발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암묵적 지식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없다. 바이올린 명장 스트라디바리의 신비한 비밀은 안일한 두 아들 때문에 영원히 무덤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헨리 힐의 ‘Antonio Stradivari’중에서)
남과 다르게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단순히 남과 다르게 산다는 이유만으로 창의적 빛을 발할 수는 없다. 남과 다르게 살되,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 낼 때, 그것을 가지고 메마른 세상 속에서 깊은 감동을 일으킬 수 있을 때, 그것이 바로 다름의 축복이며 다름의 존엄이 된다.
다름(difference)의 반대는 보편주의다. 18세기 영국은 공업화 보편주의로 기울어져 국민의 정신세계와 윤리, 도덕의 근간이 흔들렸다. 이때 감리교 창설자 존 웨슬리(John Wesley)가 등장했다. 웨슬리는 목회자였지만 그의 시선은 교회 안에만 머물러있지 않았다. 웨슬리는 세상의 어두운 골목을 들여다보았다. 공업화 보편주의의 부작용으로 생성된 소외 계층의 아픔과 역경을 웨슬리는 응시했다.
웨슬리의 종교적 천재성은 산업화 보편주의에 밀려나 방황하는 보편이하의 서민층에게 다가간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웨슬리는 치열한 물질적 경쟁에서 탈락한 소외층을 한 구석으로 끼워 넣는 식의 보편주의를 향해 큰 목소리를 낸 남다른 목회자였다.
이런 점에서 웨슬리는 도시 사역에 전념했던 마르틴 투터, 존 칼빈, 홀드라이히 쯔빙글리와 사뭇 달랐다. 웨슬리의 사역은 도시보다 광산주변, 농어촌에 치중되었다. 이 작은 다름 하나로 웨슬리는 세계 기독교의 또 다른 주류가 되었다.
찰리 채플린은 말했다. “남의 흉내 내지 말라. 질투는 무지이며, 모방은 자살이다. 그대가 만일 언덕의 소나무가 되지 못한다면 산골짝 벼랑 밑의 한 송이 꽃이 되라. 무엇이든지 자기가 되라. 남의 것을 주워 모으는 카피 인생을 살지 말라.” 하늘에 수많은 별이 떠 있어도 제각기 모양이 다르다. 하늘에서 내리는 수많은 눈송이도 제각기 개성이 있어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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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만/목사·AG 뉴욕신학대학(원)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