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이 행복한 사회

2023-03-31 (금)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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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에서 여자아이들이 중학교에 가지 못하게 된 지 1년이다. 지난해 3월 23일 탈레반 정부는 여자아이들의 교육을 6학년까지로 제한했다. 이어 12월에는 여성의 대학교육을 전면금지했다.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기존의 여고생들은 갑자기 목표를 잃어버렸다.

2021년 8월 미군이 철수하고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세력, 탈레반이 아프간을 장악하면서 여성들은 악몽의 시대를 살고 있다. 정부기관에서 일하던 여성들은 쫓겨났고, 남자가족 동행 없이 여행할 수 없으며, 외출 시 부르카 같은 전통복장으로 전신을 가리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공원이나 축제, 헬스센터 등은 모두 여성 금지구역. 인간으로서 여성의 기본권은 사라졌다.

이런 탄압이 아프간에서 처음은 아니다. 탈레반이 실질 통치했던 90년대 후반 여성들은 이미 처절하게 경험했다. 2001년 9.11 테러 후 미국의 공격으로 탈레반이 축출되고 나서 보니 아프간 전체 초등학생 중 여학생은 ‘제로’. 이후 20년 동안 초중학교 여학생 360만, 여고생 9만으로 늘었는데, 이제 다시 ‘제로’로 돌아가고 있다. 여성교육은 아프간 문화와 전통 그리고 이슬람법에 따라 재조정하겠다는 것이 탈레반 당국의 방침이다.


미국에서 3월은 여성역사의 달이다. 여성의 달을 보내며 아프간 상황을 보자니 그곳 여성들의 처지가 새삼 가슴을 찌른다. 21세기에 그들은 우리 조모나 증조모세대의 삶을 살고 있다. ‘문화와 전통’에 따라 여성을 억압했던 것은 어느 문화권도 예외가 아니었다. 가부장제를 축으로 하는 전근대적 사회에서 남성중심 문화와 남존여비 전통은 공고했다. 한국에서 시집간 여성이 아들을 못 낳으면 죄인 취급을 받고, 없는 가정에서 논밭 팔아 아들만 대학에 보내며, 공단의 여공들이 배를 주리며 번 돈으로 오빠나 남동생 학비를 대던 것이 불과 반세기전이다.

이후 성평등에 대한 의식은 바뀌고 세상은 달라졌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대학 캠퍼스에 남학생보다 여학생이 많고, 남성들이 독점하던 분야로 여성들이 속속 진출하며 활동영역을 넓히고 있다. 여성 CEO도, 여성 대법관도, 여성 대통령도 더 이상 신기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이제 여성은 평등한가, 평등하다고 느끼는가.

점점 많은 여성들이 결혼을 미루거나 아예 안하는 대신 일을 선택하고 있다. 결혼보다 커리어를 우선시 하는 추세이다. 지난 10년 사이 미국에서 미혼의 여성근로자 숫자는 빠르게 늘고 있다. 한편 미국여성들의 초혼 중간나이는 1956년 20.1세에서 2022년 28.2세로 늦춰졌다. 센서스국 통계가 그러하지만 주변의 딸들을 보면 더 늦어서 30대 중후반 되어야 결혼을 할까 말까이다. 2000년대만 해도 마흔이 낼모레인 아들딸이 결혼을 안 한다고 한인부모들이 속을 끓였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이다.

한국에서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2년 사회조사’에 따르면 미혼남녀 중 결혼을 꼭 해야 한다고 답한 여성은 22.1%에 불과하다(남성은 36.9%). 나머지는 결혼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거나 ‘절대 안 하겠다’는 응답. 아이를 안 갖겠다는 숫자는 결혼 안하겠다는 숫자보다 더 많다. 한국의 합계출산율(가임여성 1인당 평균 예상출생아 수)이 0.78로 세계 최하위인 배경이다.

여성들이 결혼을 안 하고 아이를 안 갖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일과 커리어에 대한 야망 그리고 가정 내 불평등. 여성의 ‘운명’으로 여겨졌던 결혼과 출산이 ‘선택’으로 바뀐 것은 일단 발전이다. 성평등 의식이 전통의 무게를 덜어내면서 자유로운 사고와 결정이 가능해졌다. 반면 여성이 결혼과 출산을 꺼리게 만드는 것은 기대에 못 미치는 현실이다.

초 경쟁사회에서 개개인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주요요인은 일과 직위 즉 커리어 성공이다. 명함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한다. 사회적 성공에 대한 여성들의 야심 또한 날로 커지고 있다. 대학/대학원까지 차별을 모르던 여성들이 성차별의 벽에 부딪치는 것은 대개 취업에 나서면서부터. 남성에 비해 실력이 뛰어나야 취직도 되고 승진도 되는 현실에서 여성들은 빡세게 일에 몰두한다.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일념에 데이트나 결혼은 뒷전으로 밀린다.

한편 구시대의 전통이 가장 확실히 보존된 곳은 가정. 결혼하는 순간 여성은 가사노동과 육아의 1차적 책임을 떠맡는다. 얼마 전 본 한국 드라마에서 검사들의 아침일과가 인상적이었다. 남자 검사는 느긋하게 일어나 아내가 차려주는 아침밥 먹고 여유롭게 출근하고, 여자 검사는 쌍둥이 아기들 씻기고 입히고 먹여서 시어머니에게 맡긴 후 정신없이 달려 나와 “또 지각?” 이라는 핀잔 속에 하루를 시작한다. 여성들 대부분이 “내 이야기!”라고 느꼈을 장면이다. 이전 세대에 비해 다분히 이기적이고 성공지향적인 젊은 여성들로서는 “저런 고생을 왜 사서 하나?” 생각할 법하다.

평등이 중요한 것은 사회 구성원들의 행복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최근 유엔이 발표한 2023 세계행복지수 1~3위 국가인 핀란드, 덴마크, 아이슬란드의 공통점은 여성이 총리라는 사실이다. 여성이 통치를 잘해서라기보다는 여성이 총리가 될 만큼 양성이 평등하니 국민들이 행복한 것으로 보인다. 조사 대상 137개국 중 한국은 61위, 탈레반이 통치하는 아프간은 꼴찌. 여성이 행복하면 그 가족이 행복하고 그만큼 국민 전반의 행복감이 높아진다. 여성이 행복해야 저출산 문제도 해결될 것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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