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 고종 때의 급진 개혁파이자 정치가인 김옥균(1851-1984)은 문과에 장원급제한 수재로 조선 주변의 개화된 열강들의 조선 침략 의도를 보면서 조국의 개화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개화를 위해 혈안이 된다. 그 일환으로 충의계를 조직해서 선진화의 개혁 확산에 힘을 쏟았다.
세계 국제 정세를 면밀히 파악하여 쇄국 정책을 반대하고 임오군란 후에 열강 들 중에 일본이 청나라나 러시아보다 군사력이 앞서 있음을 판단하고, 고종에게 탄원하여 일본식 급진 개혁을 추진했다. 일본은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을 침략하고 인명과 재산을 수탈한 만행을 잊지 않고 있는 고종과 조선의 모든 선비들이 일본과 외세를 배척했다.
조선의 운명이 풍전등하에 있는 현실에서 그는 일본과 손잡고 개혁을 단행하여 조선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그의 개혁 운동은 왕실과 조정의 반대에 직면한다. 막강한 외척 민씨 세력이 양무 운동식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고 김옥균을 탄핵했다. 김옥균은 일본식 개화를 주장하며 일본을 등에 업고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김옥균은 일본 정부가 자신을 지지하고 정치적 지원을 해줄 것으로 믿었다. 특히 다케조 신이치로 공사의 약속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민씨 세력은 청나라에게 도움을 청했다. 청나라 군이 잠입하여 김옥균의 군대를 공격했다. 병력 부족으로 김옥균은 거사 3일 만에 실패하고, 다케조 신이치로 공사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청일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일본은 갑신정변 때 일본이 입은 피해를 보상하라고 고종에게 요구했다. 조선 조정은 이를 수락하고 한성 조약을 체결했다. 고종은 체결조건으로 김옥균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다. 일본은 정치범은 국제법상 인도할 수가 없다고 고종의 제안을 거절했다.
김옥균과 개화파 지지자들의 존재는 청일 간에 뜨거운 감자로 부상했다. 일본 정부는 이들의 정치적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김옥균을 절해고도인 오가사와라 섬에 유배를 보낸다. 1890년 김옥균이 연금에서 풀려난 후 일본으로부터 토사구팽 당한 것을 절감하고 도망치듯 중국 상하이로 건너 갔다. 고종과 조선의 선비들은 김옥균을 민족의 반역자로 낙인찍고 홍종우를 밀사로 상하이로 보낸다. 1894년 3월 27일. 홍종우는 잠을 자고 있는 김옥균을 리볼버 권총으로 살해했다.
김옥균의 시신은 선박으로 조선에 옮겨졌고, 시신을 갈기갈기 절단하는 부관참시의 형을 집행했다.
김옥균의 개화혁명 과정을 살펴보면, 오늘 날 한일 관계에 많은 점을 시사한다. 아무리 능력이 있고 좋은 생각과 정책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혼자만의 개인적인 독단으로 개혁을 추진하면, 심각한 반대를 초래하고 국민적인 지탄을 받고 개혁은 실패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으로 인하여 동북아의 중, 북, 한, 미, 일의 안보 상황이 심각하다. 한국 정부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한미동맹과 일과 협력을 강화한다. 더욱이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한일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한국 정부는 회담이 미래지향적으로 성공했다고 한다.
회담 내용을 살펴본다. 한국은 자발적으로 강제 징용의 피해자들의 지지도 받지 않은 안을 만들어 일본에게 제출하고, 한국 정부는 WBC의 제소를 철회하고 일본은 수출규제를 완전히 풀었다고 발표했다. 회담에 참가한 일본 재무성 관리는 회담과 수출규제 해제문제는 별개이다, 아직 수출규제 해제하는 문제는 결정된 바가 없다, 라고 언급했다.
한국의 성급한 관계 개선을 제의받은 일본 정부는 힘들이지 않고, 한일 관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한국 정부는 윤-기시다 회담을 통해 컵에 물을 반쯤 담은 성공이라 표현했다. 나머지 반은 일본이 무엇으로 채워줄 것인가?
중국과는 지난 20년이 넘게 무역을 통해 한국은 매년 흑자를 이루었다. 반면 일본과의 교역은 언제나 만년 대형 적자였다. 그것도 자동차, 전자제품, 아사히 맥주, 옷 등의 소비재 일색이었다. 한국의 자동차나 세계적인 명품, 삼성의 핸드폰과 TV는 사주지 않으면서 말이다.
손익계산에 밝은 일본에게 별 소득 없이 회담을 고속으로 진행시키는 한국 정부를 보며, 윤-기시다의 셔틀 외교로 배척된 아사히 맥주와 소비재들이 다시 한국 시장으로 몰려 들어와 가뜩이나 어려운 한국 경제에 무역 적자만 심화시킬 것이 아닐까 라고 심히 염려가 된다. 어렵게 만든 한일 관계가 위험한 선택이 아니기를 기원한다.
<
대니얼 김 / 그린벨트,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