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10월 뉴욕은 아수라장이었다. 주가는 전년에 비해 절반으로 폭락하고 은행은 은행마다 예금을 찾아가려는 손님들로 아우성이었다. ‘유나이티드 카퍼 회사’의 주가를 조작하려던 투기꾼들의 시도가 실패하면서 이들에게 돈을 대준 은행과 투자 회사에 손실이 발생했고 이들이 망할 것을 우려한 예금주들이 앞다퉈 돈을 빼갔기 때문이었다.
이 와중에 뉴욕에서 세번째로 규모가 큰 투자회사인 ‘니커바커 트러스트 회사’가 파산했고 이로 인한 공포가 전국으로 퍼져갔다. 자칫 미 금융권 전체가 마비될 수 있는 상황에서 구원자가 나타났다. J.P. 모건이 그 사람이다. 당시 미 최대 금융 재벌이었던 그는 은행과 투자 회사의 연쇄 도산을 막기 위한 구제 기금 설립을 주도, 일단 사태는 진정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뉴욕증시가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한다. 뉴욕증시 회장인 랜섬 토머스는 10월 24일 모건에게 달려가 당장 증시가 문을 닫게 생겼다고 하소연하자 모건은 다시 2,500만 달러의 긴급 구제 자금 마련에 나선다.
그 덕에 뉴욕 증시는 살아났지만 이번에는 뉴욕시가 위기에 빠진다. 조지 맥클리런 뉴욕 시장은 11월 1일까지 2,000만 달러를 마련하지 못하면 뉴욕시는 파산할 것이라며 모건에 도움을 호소한다. 모건은 다시 3,000만 달러를 모아 뉴욕시를 살린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11월 2일 뉴욕 최대 증권회사의 하나인 ‘무어&쉴리’가 파산 일보 직전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테네시 석탄, 철광, 철도 회사(TC&I)’ 주식을 담보로 돈을 잔뜩 빌렸는데 이 회사 주식이 추락하면서 증권회사도 문을 닫게 생긴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겨우 안정세를 찾아가던 금융업계는 다시 패닉에 빠질 것이 뻔했다.
모건은 주요 은행과 투자회사 책임자 120여명을 자기 집 도서관으로 불러 모은 후 문을 잠그고 구제 기금 마련에 관한 합의안이 나올 때까지 집에 가지 못하게 했다. 다음날인 3일 새벽 4시가 넘어 겨우 합의안이 도출됐다.
모건은 사태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U.S. 스틸이TC&I를 인수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문제가 남아 있었다. 당시 대통령이던 시오도어 루즈벨트는 기업 합병 반대론자였다. 모건은 일요일 밤 열차로 사람을 백악관에 보내 월요일 시장이 열리기 전 연방 정부가 이를 승인하지 않으면 금융 시장이 패닉에 빠질 것이란 점을 설명하고 개장 한 시간 전 루즈벨트의 재가를 얻어냈다.
이렇게 해 1907년의 위기는 겨우 해결됐지만 더 이상 한 개인에게 금융 위기 해결을 맡긴다는 것은 무리라는 컨센서스가 마련됐고 그 결과가 1913년 제정된 ‘연방 준비 은행법’이다. 지금 미국의 중앙 은행인 연방 준비 은행은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스위스 최대 은행인 UBS는 파산 위기에 몰린 ‘크레디 스위스 은행’을 30억 달러에 인수한다고 19일 전격 발표했다. 스위스 정부는 이 인수 작업이 순조롭게 이뤄지는 것을 돕기 위해 스위스 국립 은행을 통해 1,000억 달러를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이들이 월요일인 20일 아시아 증시 개장을 몇 시간 앞두고 이를 밝힌 것은 ‘크레디 스위스’ 파산설에 불안을 느낀 투자가들이 패닉을 일으켜 세계 증시와 금융 시장이 요동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임은 물론이다. 지난 주 ‘실리콘 밸리 은행’(SVB) 파산으로 인한 충격을 막기 위해 연방 정부가 일요일 이 은행 모든 예금을 보장한다고 밝힌 것과 같은 맥락이다.
2008년 이후 최대 규모인 두 스위스 은행간의 번개 같은 인수 합병은 전 세계에 거래처를 갖고 있는 ‘크레디 스위스’가 도산할 경우 그 여파는 SVB와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은행은 하루 100억 달러씩 예금이 빠져 나가 문 닫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었다.
1907년 금융 위기도, 1929년 대공황도, 2008년 대불황도 결국은 뱅크런에서 시작됐다. 뱅크런은 모든 은행이 예금의 일부만 보관하고 나머지를 대출해 돈을 버는 현 체제 하에서는 주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예금주가 은행이 문을 닫을 수 있다는 공포를 느껴 은행으로 달려가는 순간 은행은 진짜 문을 닫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한꺼번에 맡긴 돈을 돌려줄 수 있는 은행은 없기 때문이다. SVB는 연방 국채에 투자했다 난 손실이, ‘크레디 스위스’는 잘못된 투자와 스캔들로 인한 위상 추락이 원인이었지만 결과는 같다.
어쨌든 미국과 스위스 양국의 발빠른 대처로 두 은행의 추락으로 인한 위기가 금융계 전체로 퍼지는 것은 일단 막았지만 이것이 사태의 끝인지는 좀 더 지켜 봐야 한다. 한 때는 진정되는듯 하다 재발하는 것이 금융 위기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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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