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따라 어둠을 밝히는 빛 기구가 발달되었듯 언어 역시 진화한다. 예전엔 자애성(Narcissitic)이란 단어가 유행하더니 요즘 부쩍 가스라이팅의 열풍이 불고 있다. 2004년 옥스포드 사전에 신조어로 등록될 만큼 이 말을 모르면 가끔 바보 취급을 당한다. 세계 언론매체도 2022년 사회현상을 일컫는 낱말로 가스라이팅을 택했을 정도이다.
가스라이팅은 상대방의 주위환경이나 상황을 교묘히 조작하여 당사자가 자신의 오감과 기억, 판단에 의심을 품고 현실감각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정서적, 심리적 학대를 뜻한다. 그 결과 상대방은 간단한 결정도 못하는 무력한 사람이 되어 오직 가해자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게 만드는 심리적 지배라 할 수 있다. 가스라이팅을 쉽게 이해하려면 1944년 영화 ‘가스라이트’ 얘기를 하는 게 좋다. 왕년의 명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이 주연하여 아카데미상도 탔다.
영화 내용은 대충 이렇다. 젊은 여성이 죽은 이모의 유산을 받게 된다. 이 사실을 아는 매력적인 남자가 그녀에게 접근해 결혼한다. 아내의 유산에 욕심을 품은 남편은 아내의 정신을 망가뜨려 스스로 미쳤다고 믿게 만든다. 방법은 남편이 일하러 나간다고 말한 후 아내 모르게 아래층 안방에 내려가 물건을 숨기거나, 물건의 위치를 바꾸어놓는다. 그리고 유산을 모아둔 이층에 올라가 보석 등 귀중품을 찾기 위해 가스등을 켠다. 가스를 담아두는 가스통의 저장량이 적어지면 집안의 모든 가스등은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남편이 외출할 때마다 아래층 물건이 없어지거나 위치가 바뀌고, 이층에서 발자국소리 같은 게 들리면서 안방의 가스등이 희미해지자 아내는 긴장과 불안에 휩싸인다. 남편에게 이를 말하면 남편은 아내가 너무 예민해서 잘못 들었고 잘못 보았다며 안심시킨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아내는 자신의 청각과 시각, 자신의 생각을 믿지 못하고 판단력이 부족해져 모든 일을 남편에게 의존하게 된다.
가스라이팅은 사회적 서열이 뚜렷한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선생과 학생, 의사와 환자, 성직자와 신도, 장교와 사병 사이에서 흔히 일어나지만 다른 인간관계에서도 볼 수 있다. 상대의 약점을 잘 아는 가까운 사람들에 의해 행해지며 주로 반사회성 인격장애자, 사이코패스, 자애성 성격장애자들이 가스라이팅을 즐긴다. 연인이나 거짓말을 일삼는 정치가도 종종 가스라이팅을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다.
가끔 세뇌와 그루밍이 가스라이팅과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을 받는다. 이 세 단어의 뿌리는 같다. 즉, 타인의 마음을 꽉 사로잡은 후 심리적 지배를 통해 원하는 바를 이루는 것이다. 그루밍은 먼저 상대를 잘 구슬려 친밀감을 쌓고 목적을 이룬다. 일반적으로 성범죄에 많이 이용된다. 세뇌는 외부로부터 정보를 차단한 후 심리적 지배를 꾀한다. 사교집단이나 극렬 정치집단에 의해 많이 행해진다.
언론매체가 가스라이팅이란 말을 너무 확대 해석하여 거의 모든 부정적인 사회현상, 심리현상을 가스라이팅으로 설명하려한다. 최근 정신과에도 우울증, 공황장애, 강박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심지어 정신분열증도 내면 가스라이팅(Inner gaslighting)과 자애성 가스라이팅 때문에 발생한다는 새로운 개념이 소개되었다.
내면 가스라이팅은 자신의 감정과 사고를 믿지 못해 자신을 의심하고, 정체성의 혼란으로 자신을 비하하고, 자신의 성취를 우연으로 돌리며, 타인의 말을 잘 따르고, 타인이 화나지 않도록 사과를 잘 하고 자주 용서를 구한다.
살다보면 나도 모르게 누구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는지, 반대로 내가 누구를 가스라이팅 하는지 혼란스런 때가 있다. 어떤 사람이 교묘하게 부정적, 비판적 메시지를 계속 줄 때 정신 바짝 차리고 이를 알아채야한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하고 행동에 옮기면 가스라이팅을 피할 수 있다. 반면 스스로 변할 힘도 용기도 없어 누구에게 의지하려고 하면 가스라이팅 당할 가능성이 크다. 자신의 장점, 자신이 잘하는 것들로 정신적 무장을 하여 튼튼한 자아를 가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