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이 변신론이 떠오른다. 고체가 아닌 ‘액상의 근대’라는 말도 떠오른다. 신에게는 변론이 필요하고, 사회 현상뿐 아니라 이제 물리의 세계에도 단단하고 믿음직한 반석 같은 것은 기대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딛고 있는 땅이 요동친다면 무엇인들 의심없이 고정되어 있을까? 이제 무엇을 기준삼아 어디에 기반해야 하나?
그러고보니 그동안 참으로 공고히 땅을 믿고 땅에 의지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알겠다. 그 믿었던 땅이 어느 날 수만 명을 일순에 집어 삼켰다. 바다가 쳐들어와 제가 주인임을 선언하더니 이제는 땅이다. 믿을 곳이 없다.
기적처럼 살아나온 사람들이 외치는 신에의 감사도 듣기에 착잡하기는 마찬가지다. 생환을 신에게 감사한다면 신의 자비를 입지 못한 수만 명의 사람들은 신을 원망해야 하나? 그들이 더 죄가 많아선가? 그럴 리가 없다.
아무리 우주로 사람을 보내고 자율자동차가 길을 달리고 AI 애인이 출현하고 유전자 조작으로 병을 고쳐도 우리의 과학 수준은 아직 여기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쓰나미가 오면 산으로 피하고, 화산이 터지면 바다로 달리고, 지진이 나면 하늘이 열린 곳으로 뛰어야 한다.
1923년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도쿄에 자기가 디자인한 호텔을 완공시켰다. 그가 막 일본에서 미국으로 귀국하자 마자 칸토 대지진이 일어났다. 그에게 전화를 건 관계자가 심각한 도시 파괴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호텔은 무사하다고 하자 그는 당연한 일이라고 답변했다. 자기가 그만큼 완벽하게 설계하고 완벽하게 시공했다는 자신감이다.
이번에도 지진이 일어난 터키의 어떤 마을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미미했다는 뉴스가 있었지만, 그래서 이번 재해가 마치 인재인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그것도 마냥 맞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천재도 있고 인재도 있고 부패한 권력도 있고 사람들의 안일과 무감각도 있고 믿어왔던 과학의 한계도 모두 어우러져 한 몫 하지 않았을까?
이제 망각의 시간이 오고 있다. 현장에서는 빨리 덮고 빨리 잊자는 캠페인도 일어날 것이고, 재건의 기치 아래 용트림도 일어날 것이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사회든 물리계든 인간이든 이젠 액상(?相)을 넘어 기상(氣相)의 세계가 되어 가는 것 같다. 액체는 문리에 따라 흐르고 스미고 내려와 모이지만 기체는 중력을 역행해 증발하고 흩어지고 사라진다. 그 사라지는 세계 속에서 결국 내 마음에 각인된 기억만이, 그 남모르는 아픔과 분절된 환희만이, 우리 짧고 불안한 생의 유일한 진실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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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국/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