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아버지를 떠나보내며

2023-02-25 (토) 문일룡 / 변호사 기자
크게 작게
아버지가 떠났다. 약 12년 전에 먼저 간 어머니를 찾아가신 거다. 거의 90년을 이 세상에서 사셨으니 장수의 복을 누렸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100세까지는 어렵지 않다고 누누이 얘기했던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돌아가신지 3주가 지난 저번 주말에 장례를 마쳤다. 먼 곳에 가 계시다가 돌아가셨기에 시신을 이 곳까지 모시는데 시간이 제법 걸렸다.

장례는 아버지의 유지를 따라 가족들만 모여서 조용히 치렀다. 50년을 이 지역에서 사셨으니 주위에 아는 분들도 많은데 소식을 알리지 않고 가족들만 모여서 마지막 인사를 드린 게 죄송스럽다. 아버지는 유가족과 친구들을 번거롭게 하는 일을 피하려고 그랬던 것 같다. 원래 다른 사람들에게 폐 끼치는 일을 극도로 싫어했던 아버지의 성격을 기억하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사람들 모두 각자 고유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유독 특이했던 것 같다. 변화를 싫어하는 것만큼 인내심도 강했다. 돌아가실 때까지 거의 매일 아침식사는 라면이었다. 몸에 좋지 않다고 아무리 말씀을 드려도 소용없었다. 그리 안 좋다면 어떻게 당신처럼 오래 살 수가 있겠느냐고, 내가 반박이 궁한 논리를 내세웠다. 그래도 다행히 어느 시점부터는 혈압에 좋지 않은 염분 섭취를 줄이려고 라면 수프 양을 절반 이상 줄였다.


미국에 취업이민을 와서 은퇴할 때까지 오직 한 직장에서만 근무하셨다. 영어를 잘 못 했기에 승진은 생각지도 않았지만 전동기 수리 기술에 대해서는 남다른 자부심을 가졌다. 워싱턴 DC에 있는 연방정부 건물에서 사용되는 냉온방 장치 전동기의 상당수를 당신이 수리했다고 자랑하곤 하셨다. 나머지 가족들보다 1년 먼저 미국에 와서 일하는 동안 이 월급으로는 도저히 이제 곧 오는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힘드니 직장을 그만 둘 수밖에 없다고 고용주를 협박해서 파격적인 월급 인상을 유도했다는 아버지의 무용담은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 아무리 반복해도 질리지 않았다.

직장 생활할 때 매일 집에서 준비해갔던 아버지의 점심은 늘 볼라냐 샌드위치였다. 메뉴가 바뀐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같은 음식을 그렇게 오래 질리지 않고 먹을 수 있는지 불가사의였다. 퇴근 후 바로 저녁식사를 하고 취미로 한 일도 저녁 테이블 그 자리에 앉아서 하는 포커카드 패떼기였는데 몇 시간은 쉬지 않고 했다. 그것도 매일.

그런 아버지가 당신이 살던 작은 타운하우스를 정리하고 성인 데이케어가 아래층에 있는 요양원에 들어갔다가 적응을 못하고 나오신 것은 뜻밖이었다. 그 후 내 집에서 몇 주 계시다가 그래도 세 자녀 중 직장에서 은퇴한 딸이 아버지를 돌보는 게 최적격이라 동생이 아버지를 모셔갔고 한 1주일 정도는 잘 계셨다.

그러다가 아버지 상태가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바로 비행기 표를 구해 달려갔다. 열 몇 시간을 가서 뵌 아버지의 모습은 많이 변해있었다. 아버지를 매제와 함께 부축해 식탁에 앉혀 모시고 아버지가 좋아하는 소주를 두어 잔 같이 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 잠자리에 드셨다. 나도 아버지 옆에 누워 아버지 손을 잡았다. 살은 다 빠졌지만 통뼈는 그대로였다. 그렇게 잠에 들었던 아버지 소식을 다시 들은 것은 내가 다음 날 밤샘 비행기로 돌아와서 일을 좀 보고 다시 하룻밤을 지낸 후 새벽이었다. 아버지가 떠셨다는 동생의 텍스트 메시지였다. 무려 55시간의 깊은 잠을 뒤로 하고 말이다.

메시지를 받자마자 바로 생각난 게 뉴욕에 사는 둘째 아들이었다. 보스턴에 사는 큰 애는 얼마 전 태어난 갓난애 때문에 꼼짝 못하지만 둘째는 할아버지를 뵙기 위해 그 날 아침에 비행기로 가기로 되어있었다. 둘째에게 연락하니 이미 고모로부터 소식을 들었단다. 그리고 자신은 비행기 표도 미처 취소 못한 채 나와 같이 있기 위해 지금 이미 기차를 타고 내려오는 중이라고 했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슬픔과 속 깊은 둘째에 대한 고마움이 범벅됐다. 눈시울이 갑자기 뜨거웠다.

<문일룡 / 변호사 기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