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임윤찬 때문에 우리와 부쩍 가까워진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의 탄생 150주년이자 타계 80주기가 되는 해이다.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그의 유산을 기리는 행사를 잇달아 열고 있는데, LA 필하모닉도 2월9일부터 19일까지 두 주말에 걸쳐 그의 대표작들을 공연하는 ‘라흐마니노프 사이클’을 개최했다.
구스타보 두다멜 지휘로 피아니스트 유자 왕(Yuja Wang, 36)이 협연한 피아노협주곡 전곡 연주가 하이라이트였고, 이와 함께 관현악곡인 ‘심포닉 댄스’와 코랄 심포니 ‘벨스’(The Bells)도 들을 수 있었던 특별한 행사였다.
전설적인 피아니스트였던 라흐마니노프는 198cm의 장신에 건반 13개를 누르는 큰 손을 지녔던 만큼 피아노라는 악기의 극한까지 탐구하는 협주곡을 4개 썼고, 피아노변주곡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 역시 대단해서 이를 5번째 피아노협주곡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들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것은 2번이다.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나왔고, 2악장의 아름다운 선율은 ‘올 바이 마이셀프’(All By Myself)라는 에릭 카멘의 노래를 통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이루지 못할 사랑을 가슴 저미게 그린 영화 ‘짧은 만남’(Brief Encounter, 1945)에서는 기차역을 배경으로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가는 장중하고 비감미 넘치는 2번 협주곡의 선율이 잊지 못할 감동을 선사한다.
그 다음으로 유명한 작품이 3번, 임윤찬의 밴 클라이번 콩쿠르 연주영상이 현재 998만 뷰를 넘어선 바로 그 화제의 협주곡이다. 이 곡 역시 영화 ‘샤인’(1996)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라흐 3번에 집착하다가 미쳐버린 호주의 천재 피아니스트(데이빗 헬프갓)의 실화를 그린 이 영화에서 협주곡 3번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곡”이며 “미치지 않고서야 칠 수 없는 곡”으로 묘사된다. 그만큼 난이도가 높은 곡인데 사실 요즘 웬만한 정상급 콘서트 피아니스트들은 미치지 않고도 충분히 소화해내는 인기 레퍼토리의 하나다.
수퍼스타 피아니스트 유자 왕이 지난달 말 뉴욕 카네기홀에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전곡을 하루에 모두 연주하는 전무후무한 마라톤 콘서트를 열었다. 야닉 네제 세갱이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4시간 반 동안 5개 콘체르토를 연달아 공연한 것이다.
현지에서 나온 리뷰에 의하면 그 모든 협주곡에다 앙코르까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매번 처음처럼 명료하고 파워풀하고 눈부시게 연주했다고 한다. 얄미울 정도로 완벽한 기교를 자랑하는 유자 왕이 다섯 번 모두 다른 드레스를 입고 나와 눈까지 즐겁게 해준 모양이다.
이번 LA필의 ‘라흐마니노프 사이클’ 동안 3번과 4번의 공연에 갔었다. 3번은 임윤찬의 연주와 비교해보고 싶어서였고, 4번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서 갔다.
과연 두 사람의 3번 연주는 달라도 많이 달랐다. 유자 왕은 일단 스피드가 훨씬 빨라서 테크닉이 더 화려하게 표현됐고 국제무대에서 수없이 연주해본 베테란답게 노련하고 유려했다. 반면 임윤찬은 콩쿠르라는 어마어마한 압력감 때문인지 한 음 한 음에 사력을 다하는 밀도 깊은 연주로 듣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한마디로 임윤찬의 연주는 깊이와 혼이 서린 남성적인 연주였고, 유자 왕의 연주는 세밀하며 눈부시게 반짝이는 여성적인 연주였다. 그런데 나이(유자 왕이 두배)와 경력과 국제적 지명도를 감안한다면 누가 승자인지는 말할 필요가 없겠다.
3번 연주에서 또 달리 느낀 것은 오케스트라의 아름다움이었다. 콩쿠르 영상은 아무래도 피아노 중심으로 녹음되기 때문에 관현악 연주는 대충 흘려듣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두다멜의 사려 깊은 지휘로 라이브 연주를 들으니 오케스트라 반주가 어찌나 깊고 풍성하고 아름답던지, 슬라브 적 광대함과 서정 넘치는 마이너(단조) 협주곡의 매력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한편, 오랜만에 유자 왕의 무대패션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하고 싶다. 유난히 튀는 그녀의 연주패션이 공론화된 것은 2011년 할리웃보울에서의 라흐 3번 연주 때였다. 몸에 짝 달라붙는 초미니 진홍색 드레스에 ‘킬힐’을 신고 나온 당시 24세의 왕에 대해 LA타임스의 음악비평가 마크 스웨드가 “18세 이하는 입장 금지를 시켜야겠다”고 쓴 이후 클래식 연주자의 드레스코드 논쟁이 불붙었었다. 이후에도 몇몇 비평가들이 등허리나 옆구리, 허벅지를 완전히 노출시킨 야한 드레스에 대해 ‘스트리퍼’ 같다는 등 비호의적 시각을 내비쳤지만 유자 왕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매번 지나치게 섹시한 드레스를 입고 킬 힐 워킹으로 세계무대를 누벼왔다.
이번 LA필의 연주에서도 그녀는 이틀 모두 다른 색의 반짝이 드레스를 입고 등장했는데 정도가 좀 심했다. 이건 드레스가 아니라 수영복이었다. 어깨와 등을 다 드러낸 건 뭐 언제나 그랬으니까 넘어가자. 그런데 앞품만 간신히 가린 치마가 어찌나 짧던지, 전 옥타브를 넘나드는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을 치느라 엉덩이를 이쪽저쪽으로 들썩일 때마다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무려 4인치의 스틸레토 힐은 신고 걷기도 버거워 보이는데 어떻게 페달을 밟는지 그 또한 경이로운 묘기수준이었다.
유자 왕은 대단히 섹시하고 날씬하며 매혹적인 여성이다. 하지만 피아니스트는 몸매가 아니라 피아노 연주로 승부해야 하는거 아닐까? 유자 왕 팬이었는데 점점 눈살이 찌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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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