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가까운 투병이었다. 뼈에 악성 종양이 생기는 골육종 진단을 받았었다. 아이들 셋은 아직 어리다. 80년대 생, 이제 마흔 두 살-. 고 김수영씨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녀와는 3년전에 한 번 만났다. 그후로 연락은 없었다. 얼마 전에 우연히 근황을 알게 됐다. 마지막 고비를 넘고 있었다. 얼마 뒤 부음이 전해졌다. 그와는 짧게 만났으나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그에게 들은 이야기들이 아직 기억에 생생하다.
그는 서른 두 살 무렵 암 진단을 받았다. 전이되고, 재발했고, 투병 중에 출산도 했다. 8시간이 걸린 대수술 등 여러 번의 수술과 셀 수 없이 많은 항암 치료를 받았다. 오른팔을 잘라야 했다. 그녀의 직장 근처 까페에서 만나던 날 회색 재킷을 걸치고 나왔는데 한쪽 소매가 헐렁했다. 마음이 아팠다.
그는 투병을 여행에 빗대 이야기했었다. 곳곳에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대는 여행이었다. 30대 여성에게는 가혹한 여정이었다. 김수영씨는 그 여행길에서 체득한 감사, 나눔, 순종 등에 대해 말했다. 처음 듣는 주제의 이야기들은 아니었으나 아무나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때가 암 투병 7년째였다.
그녀의 영결식에는 많은 조객이 왔다. 장의사 주차장이 작지 않았으나 길 건너 애나하임 시청과 인근 공용 주차건물에 차를 세우고 온 사람도 있었다. 소리 없는 비통함과 안타까움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그는 힘든 투병 중에도 배우고, 나누고, 선교여행을 하고, 많은 사람과 교유했다고 한다. 한 팔로 여러 일을 하고, 많은 것을 보듬었다. 몸을 움직이기 힘든 병세에도 환한 얼굴이었다고 그를 추모했다.
어느 집이나 문 열고 들여다보면 말못할 고민들이 있다고 한다. 드러내 말만 하지 않을 따름. 어려움에 등급을 매길 수는 없겠으나 누구나 자기에게 닥친 문제가 가장 크고 무거울 것이다. 남편 최성근씨에게 전화해 보기로 했다. 투병 중이던 김수영씨에게 처음 연락하며 망설였던 것과 비슷한 이유로 망설여 졌으나, 그의 아내에게 전화했던 것과 같은 이유로 전화를 했다. 이들의 이야기가 지금 광야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어떤 사람에게는 격려나 위로, 용기를 북돋우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었다.
아는 것은 김수영씨의 휴대 전화뿐. 신호음이 길게 울렸으나 받지 않았다. 전화 번호는 살아 있으나 전화 주인이 없었다. 부부가 출석하는 교회에 메시지를 남기자 연락이 왔다.
일주일 여 전에 하관예배를 마친 그는 아내의 빈 자리 때문에 분주한 듯했다.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은행 일을 보고, 다음날은 아내의 직장 동료들을 만나기로 했다고 한다. 그녀의 직장은 다운타운에 있는 LA통합교육구. 한국서 대입 수능까지 본 후 왔다는 고 김수영씨는 UC 버클리 건축학과를 졸업한 뒤 교육구에 들어갔다. 투병을 하면서도 직장 일을 놓지 않아 여기가 평생 직장이 됐다.
지난해 겨울부터 심한 기침을 하면서 병세의 악화가 눈에 보였다고 한다. 반 년 전부터는 거의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약은 더 이상 듣지 않았다. 지난 10월 입원하고 있던 UCLA 병원에서 의사 3명이 가족과 만났다. 미안하다고 했다. “뇌로도 퍼졌다. 짧으면 2주, 길면 한 달”이라고 말했다. 마사지를 하면 옆구리와 다리에서도 암세포가 만져졌다.
“엄마 잘 하고 있어, 파이팅!” 그녀는 병상에서 아이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기력이 있을 때는 책을 읽어주었다. 마지막까지 삶의 끈을 놓지 않았다. 교회 프로그램에는 아이 셋을 다 데리고 참석하곤 했다. 한 손으로 요리하며 소그룹을 이끌었다. 긴 투병을 통해 그가 깨달은 나눔, 감사, 순종의 삶은 마지막까지 이어졌다.
엄마를 떠나보낸 아이들은 걱정했던 것 보다 괜찮아 보인다고 아버지는 전한다. “사랑하는 엄마, 지금은 헤어졌지만 언젠가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런 믿음이 아이들에게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엄마의 믿음은 우선 아이들에게서 열매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
최성근씨는 아버지가 야구 감독이었으나 그에게 야구를 가르치지 않았다. 미국에 온 후 그는 대신 일식 전문가가 됐다. 하지만 업소 일에 매여 있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아내의 병 구완과 아이들 건사는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주인이 굳이 붙어 있지 않아도 되는 비즈니스를 찾았다. 힘든 여행에 동행한 부부는 믿음의 동반자이기도 했으나 아내와 남편의 신앙에는 온도 차가 있을 수 있다. 어느 부부에게나 이건 생각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는 아내를 영혼의 동반자, 소울 메이트였다고 한다. 고난의 과정을 통해 이런 차이를 이겨내고 하나가 된 것이다. 아내는 주어진 시간 속에서 최선의 삶, 여한 없이 자신이 할 일을 다한 삶을 살았다고 했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스테로이드 복용으로 얼굴이 부어오르는가 하면, 마지막엔 앙상하게 마르며 투병하던 아내가 아름답게 보였다고 한다.
간구하던 기적 같은 완치의 끝도 결국 죽음으로 귀결된다. 불멸이 답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지상의 삶은 잠시 다니러 온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떤 삶이 되어야 하는가. 길지 않았으나 치열하게 살았던 한 젊은 여성, 이들 부부가 함께 했던 동반 여행 이야기는 다시 이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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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