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 신통치 않아 치과에 가서 X-Ray를 찍어보니 이뿌리가 썩었다고 한다. 양 옆이 두개를, 앞니 두개를 제거해서 임플란트 해야한다며 날짜를 잡아 2시간에 걸쳐 시술을 하였다.
이제 몸뚱이가 낡아 교체를 하여야하는 시기가 온 것이구나 하고 자위하지만 이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마취주사를 놓으니 감각이 없어지고 그 때부터는 내 잇몸은 내 것이 아니고 의사의 것이다. 째고 긁고 갈고 헤집어도 소리만 들리고 나는 전혀 이가 아픈지 모르는 몸뚱이다. 누가 발명해 놓았는지 신통하고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다.
최면이라는 것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아닐까 싶다. 인생을 두가지 유형으로 분류한 어느 분의 말을 빌리면 ‘온도계 같은 인생’ 즉 주변의 영향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온도 조절기 같은 인생’ 즉 주변에 영향을 주는 사람이 있단다.
대부분 전자 같은 인생이 많은 건 아닌지 자신을 돌아볼 일이다. 살면서 스스로 삶의 지표나 목표를 정해 정진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불평과 원망과 절망으로 세월을 허송하는 것은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마취 당한 건 아닐까. 믿었다가 당하는 일이나 은혜를 배신으로 대접 받는 일이나 아는 사이에 속아 사는 일들이 부지기수인 것을 누가 미리 알 수 있을까. 누가 말하기를 절망과 후회와 실패는 인생의 특기라고 했는데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진실이기도 하다.
데이비드 니코라는 분이 절대로 변할 수 없는 인생의 다섯가지 법칙을 소개했는데 첫째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은 없다. 둘째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셋째 인생은 불공평하다. 넷째 고통은 삶의 일부분이고 자연이다. 다섯째 사람들은 때로 사랑이 없고 충실하지 않는다.
내가 설계한 계획된 삶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사람이 있을까.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서 비교의식에서 자유하는 마음이 얼마나 될까. 아무리 태연한 척 해도 고통에서 해방된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하면 틀림이 없는 진실이다.
마취나 최면은 깨어나게 마련이고 잠시나마 다른 세상에 다녀온 시간이라면 적당한 표현일까. 거울 앞에 선 자신의 얼굴은 완전히 낡은 노인이 멋적게 쓴 웃음을 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당분간은 죽을 먹어야 하고, 뜨거운 것과 짜고 매운 것을 삼가며 성한 이로 식사를 하란다. 먹을 것을 앞에 놓고 고민하는 이 상황에서 치아의 고마움을 다리의 통풍으로 제대로 걷지 못하는 이 다리에서 고마움을, 눈이 침침하여 보지 못하는데서 잘 보기를 원하는 애절함을, 소화가 잘 안되는 상황에서 제대로 식사 습관을 지키지 못한 후회와 참회를 누구에게 하소연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부모의 가르침을 제대로 듣고 마음에 새겨 실천했더라면, 선현들의 인생철학을 음미하고 제대로 따라갔더라면, 절대로 바꿀 수없는 인생의 법칙을 일찍이 깨달았다면… 아니 지금이라도 잘못된 고집과 아집의 마취와 최면에서 벗어난다면 보다 나은 긍정적인 삶으로 온도조절기 같은 사람으로 주변에게 도움을 주는 인생이 되지 않을 생각해본다.
인생 숫자 10계명이란 것이 있단다. 일일이 따지지 말자. 이것저것 다 하려 하지 말자. 삼삼오오 즐겁게 살자. 사생결단 하지 말자. 오기 부리지 말자. 육체적으로 건강하자. 70퍼센트 성취에 만족하자. 팔팔하게 살자. 구구절절 변명하지 말자. 10퍼센트는 베풀자. 그럴듯한 명언들 아닌가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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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명 버지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