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지구상 만물을 잉태시키고 삶의 보금자리를 제공하고 있음에도 모든 생명들에게 가혹하다. 자연계에서 수많은 생물들이 태어나지만 제대로 성장하여 다음 세대를 재생산하는 비율은 지극히 낮다.
아프리카 평원의 먹이사슬 최상층에 있는 밀림의 왕 사자도 새끼의 생존율이 30%이고 가족을 이루어 새끼를 낳고 살수 있는 확률은 겨우 10%대라고 한다. 그리고 사자 다음의 먹이 사슬에 있지만 또한 경쟁 상대인 하이에나도 70%가 사자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인간사회 속에서 같이 살고 있는 길고양이도 겨울을 버티는 것이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유한한 생명이지만 생명체들은 어떡하던지 좀더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생태계 적응을 할수 밖에 없다.
인류는 약육강식의 자연 생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타인의 고통에 대한 애처로움을 갖게 되고 의롭지 못함을 부끄러워 하게 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약육강식을 정당화 하면서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려 하는 세력에 대항하면서 평화, 평등, 박애와 같은 양심을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는 만큼 이해관계가 더 복잡해지면서 인간들이 서로 얽혀 사회 자체가 주는 정신적 스트레스도 자연 생태계 만큼 가혹하다. 그럼에도 적응하기 위해서 매일 고군분투한다.
혹독한 자연 생태계로 인해서 수많은 생명들이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어갈 때 우리는 자연에 대해서 옳고 그름과 양심을 논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생태계 안에서 발생하는 혹독함에 대해서는 옳고 그름을 따져 저항하면서 새로운 제도의 사회를 만들어 왔다. 그렇게 인류사회는 노예제, 봉건제, 그리고 자본주의 시대로 발전하면서 혁명적으로 새로운 생태계를 개척 해왔다. 물론 자본주의 생태계를 바꾸기 위한 사회주의 공산주의 혁명의 도전도 있었지만 여전히 현실 자본주의의 벽은 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자본주의 수호의 최선봉장에 미국이 있었다.
미국이 세계무대에 지존으로서 자리하기 시작한 것은 2차대전 부터다. 미국은 이때 부터 당시 세계를 주도했던 영국과 유럽의 주도권을 넘겨 받아 문명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미국식 현대 자본주의와 의회 민주주의 제도를 앞세운 미국은 러시아 주도의 공산주의 세력과 1945년 부터 1991년까지 45년동안의 대결을 승리로 마감했다.
미국이 강국이 된 것은 아메리카 대륙에 나라를 세우고 자연인구 증가보다 월등히 많은 다양한 민족과 인종을 받아들인 개방적 생태계를 만든 결과였다. 1840년에서 1918년 사이에만 약 27,50만 명이 미국에 이민을 왔다. 이렇게 이민자에게 개방적인 생태계는 아주 빠르게 유럽 전체의 생산력을 넘어서게 하였다.
워싱턴포스트의 칼럼니스트 파리드 자카리아는 ‘역주행하는 미국의 이민정책’이라는 칼럼에서 “낮선 용모에 다른 피부색과 이름마저 이상한 이민자들이 살기에 가장 좋은 나라가 미국”이라고 하면서 이민자들에 의해서 건설된 미국의 주요 장점은 개방적이고 넉넉한 이민정책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제 “미국으로의 이민은 대단히 불쾌하고 모욕적인 경험을 감수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하면서 기술자와 고학력자들에게 캐나다와 영국이 오히려 미국보다 더 관용적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민만이 아니라 미국이 소수자들에게 훨씬더 배타적으로 바뀌고 있다고 하였다.
세계 최고 지존의 미국을 만들었던 이민과 소수계에 대한 개방적 정책은 오늘날 미국의 극단적 국론분열의 가장 첨예한 이념이 되었고 지역과 인종의 전선으로 형성되고 있다. 그래서 이민정책은 제자리 걸음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4년 마다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 더 치열한 공방전만 하고 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은 강대국 미국을 만든 것은 새로운 이민자를 통해서 세상에 대한 개방적인 생태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나은 미국을 위해서 우리는 이민자로서 소수계로서 더욱더 개방적인 생태계를 유지 발전 시키도록 노력 하는 시민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