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가 아니라도 우리는 모든 것이 시시각각 변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변하는 것은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고, 나이가 들어가며 늙고,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흐르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이것을 진화하고도 하고 성장이라고도 하고 때로는 퇴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퇴보라고 해도 그것은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완벽하게 환원했다는 뜻은 아니다. 무엇이 변했어도 우리는 이미 변해 있기 때문이다.
삼라만상의 물리적인 형태만 변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생각도 변하고 뜻도 변하고 마음도 변한다. 사회도 변하고 관계도 변하고 하물며 생이 사로 변하기도 한다. 이 생과 사의 변화가 아마 변화의 극치일 것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누가 뭐라든, 세상이 두 쪽이 나도, 변하지 않겠다는 굳은 신념이 유행이다. 조그만 생각의 씨앗이 한 번 마음 밭에 뿌려지면 이것은 디지털 관계망에 의해 무한 강화되고 증강되고 단단해진다. 이제 마음 속에는 거대한 콘크리트 성 하나가 들어앉았다.
아무도,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이 성을 깨거나 넘지 못하는 듯 보인다. 성은 무수한 돌들을 주워다 더 높이 더 견고하게 쌓아 올려 안전을 도모한다. 예전에는 가랑비에 담 무너진다는 속담도 있었지만, 이 성채는 천지개벽이 나도 어림없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성은 자기 자신의 선택이요, 그 선택의 고집이고 맹종일 뿐이다. 경험 하나만 가지고도 쉬 무너뜨릴 수 있는 허술한 요새다. 내가 나와 다른 색깔을 가졌다고 적으로 자리매김한 그가 정말 처단되어야 할 나의 적인가?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경험에 의하면 나도 완벽할 리 없고 적도 완벽할 리 없다. 경우의 수는 많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고 적이 틀렸을 수도 있고 나와 적이 조금씩 둘 다 틀렸거나 조금씩 둘다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자기 선택의 끝없는 고집처럼 어이없는 것도 없다.
20세가 중엽에 이것을 설득력 있게 문자로 정리한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썼다. ‘우리의 적이 모든 잘못을 독점하고 있듯이 우리가 모든 진실을 독점하고 있다는 것은 기본적인 거짓이다. … 이제 (어떤 것만이 옳다고) 정의를 내리는 것을 끝내자. 우리는 언제나 되돌아 가서 처음부터 시작하고, 우리 자신을 위해 모든 정의를 다시 고쳐야만 한다.’
남이 던진 돌멩이를 주워 내 성을 더 견고하게 쌓아 올리기 전에 일단 나의 성을 허물어 볼 일이다. 그래서 아무 것도 없는 깨끗한 땅 위에 서서 처음처럼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그리고는 지난번보다는 조금 더 합리적인 새 성을 쌓아볼 일이다.
일생 똑 같은 집에서 똑 같은 것을 먹고 똑 같은 생각을 하면서 똑 같은 구호를 외치며 사는 삶을 고집하는 사람처럼 비자연적인 인간도 드물 것이다.
적도 나도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며, 그 불완전함의 틈새가 우리의 구원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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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국/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