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18년 한니발은 코끼리를 몰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내려왔다. 한니발을 우습게 본 로마는 4만 대군을 끌고 나왔으나 2만이 전사하고 상당수가 포로가 된다. 217년 트라시메네 호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출전했던 로마군 2만5,000명 거의 전부가 죽거나 포로가 된다. 그리고 216년 칸네 들판에서 로마는 거의 전 병력인 8만 대군을 이끌고 한니발과 맞섰지만 5만 명이 사망하고 2만명이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당한다.
그래도 로마는 굴하지 않았다. 한니발은 그 후 12년 동안 이탈리아 남부 전역을 누비지만 끝내 로마 함락에 실패한다. 그러는 사이 로마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카르타고 본토를 공격하자 귀환을 명령받은 한니발은 돌아와 자마에서 싸우지만 결국 참패, 카르타고는 멸망하고 한니발은 해외로 도주했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도대체 로마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을까. 그 첫째 원인은 로마인들의 시민 의식에서 찾을 수 있다. 로마는 전제 군주가 백성들을 강압적으로 통치하던 다른 고대 국가들과 달리 성인 남자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고 참정권과 피선거권을 줬다. 일반 시민이 뽑은 민회와 호민관이 있어 이들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돼 있었다.
로마에도 노예가 있었지만 노예도 돈을 모아 자유를 살 수 있었고 그 후에는 시민이 되는 길이 열려 있었다. 일반 시민이 국가의 일을 자기 일로 생각하고 노예도 하기에 따라서는 자유 시민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던 것이다.
원래 로마에서 태어난 성인 남자에게만 부여되는 시민권은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 전역으로 세력을 넓히면서 로마에 충성한 부족에게까지 확대됐다. 시저가 권력을 잡은 후에는 지금의 프랑스인 골 지방과 스페인에게까지 범위를 넓혔고 이들은 자신을 로마의 일부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와 스페인이 이탈리아와 같이 라틴어를 기반으로 한 언어를 쓰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런 로마의 시민이라는 자부심이 로마인들을 뭉치게 하고 이탈리아의 다른 부족들마저 로마 편에 서게 한 원동력이 됐다. 한니발은 칸네 전투 결과를 보고도 대다수 다른 부족들이 로마를 배신하지 않는 데 대해 경악했다.
반면 카르타고는 뚜렷한 신분제 사회로 계층간 이동이 거의 불가능하고 인근 타민족을 착취의 대상으로 삼았을뿐 포용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국가의 대사가 있을 때는 아동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종교적 관행일 정도로 야만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대다수 주변 국가들이 어느 쪽 편에 서기를 원했을 지는 불문가지다.
21세기 현대 사회에서 로마식 열린 체제를 갖고 있는 나라는 어디일까. 미국은 태생부터 혈연과 지연이 아니라 이념에 기초해 세워진 나라다. 미국의 건국 이념을 담고 있는 ‘독립 선언서’는 “생명과 자유, 그리고 행복 추구권”이 모든 인간의 천부적 권리이며 이를 수호하기 위해 국가가 창설되었음을 천명하고 있다. 이에 따라 각자가 자신의 능력껏 꿈을 이룰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 있다. 버락 오바마처럼 케냐 유학생의 아들이 대통령이 되고 일론 머스크처럼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유학생이 세계 제1의 부자가 될 수 있는 곳은 미국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미국 체제는 종종 조롱의 대상이 된다. 히틀러는 미국의 민주주의와 물질주의를 추구하는 미국인들을 경멸했고 일본 제국의 도조 히데키도 그랬다. 소련의 흐루셰프는 “우리는 너희를 묻어 버리겠다”고 큰소리 쳤고 오사마 빈 라덴은 자신을 ‘강한 말’, 미국을 ‘약한 말’에 비유했다. 이들은 모두 자살하거나 처형당하거나 축출됐고 이들이 이끌던 나라와 조직은 몰락했다.
최근 한 때 공산당 일당 독재 국가인 중국이 미국을 추월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기도 했으나 코로나와 관련, 완전 봉쇄와 개방을 오락가락하는 행보를 보이면서 중국식 모델은 인기를 잃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중국의 인구 추세다. 중국의 총인구와 노동 인구는 10여년전인 2010년 정점을 찍었으며 평균 연령은 미국보다 높고 2019년 출산율은 사상 최저다. 급속한 고령화와 저출산은 경제 동력을 떨어뜨릴 것이 확실한 데 생산 비용은 더 이상 낮지 않으며 창의적인 기술 개발 능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출산율 저하로 인한 사회 경제적 쇠퇴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나라가 있다면 바로 미국일 것이다. 아직도 미국의 이념과 체제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이 문만 열어주면 들어오려고 줄 서 있기 때문이다. 표보다 발로 하는 투표가 훨씬 중요하다. 숱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미국만큼 열린 체제를 갖고 있는 나라는 없다. 20세기는 미국의 세기였다. 21세기도 미국의 세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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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