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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과 이토, 하얼빈에서의 충돌

2023-01-24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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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이맘 때면 만주 하얼빈에서는 삿포로와 퀘벡과 함께 세계 3대 얼음 축제로 불리는 ‘하얼빈 빙설제’가 열린다. 아이스 페스티벌이 이곳에서 이처럼 대대적으로 열린다는 것은 그만큼 춥다는 뜻이기도 하다.

1909년 10월 26일 이곳에서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이 늦가을 찬 바람 속에 초대 한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했다. 안중근은 브라우닝 반자동 권총 7발을 발사해 3발을 명중시킨 후 에스페란토어로 “코레아 우라”(대한 독립 만세)를 세번 외친 후 체포된다.

지금 한국에서 가장 핫한 독립 운동가는 안중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년 6월 ‘예술의 전당’에서 ‘안중근, 천국에서의 꿈’이 발레 축제 개막작으로 선보인데 이어 8월에는 그의 일생을 다룬 김훈의 소설 ‘하얼빈’이 발간됐고 12월에는영화 ‘국제시장’으로 천만 감독이 된 박제균의 안중근 스토리 ‘영웅’과 이 영화의 원작인 뮤지컬 ‘영웅’이 거의 동시에 개봉됐다.


지금까지의 반응은 뜨겁다. ‘하얼빈’은 발간 후 9주 동안 교보 문고 베스트셀러 종합 1위를 지켰고 영화 ‘영웅’은 개봉 18일만에 관객수 200만을 돌파했다. ‘하얼빈’에서는 가톨릭 신자이면서 인간을 죽여야 하는 안중근의 고뇌와 이를 정치범죄가 아니라 단순한 폭도에 의한 살인으로 만들려는 일본 검찰의 노력에 관한 작가의 해석이, 영화 ‘영웅’은 안중근의 마지막 1년에 코미디와 액션, 스릴러 요소를 가미하고 가공 인물인 게이샤로 변신해 이토를 암살하려는 궁녀를 등장시킨 것이 눈길을 끈다.

황해도 해주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안중근은 공부보다는 사냥에 열심이었다. 등에 점이 7개 있어 안응칠이었던 그의 이름을 조부가 ‘무거운 뿌리’라는 뜻의 ‘중근’으로 바꾼 것도 진득하게 한 곳에 눌러 있으라는 뜻이었으나 이 희망은 이뤄지지 못했다. 안중근은 국채 보상 운동과 석탄회사 운영, 삼흥학교 설립 등 교육 운동을 벌였으나 모두 실패, 가산을 탕진한 후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간다. 의병 활동을 하며 함경북도 경흥군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해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포로를 처형하는 것은 국제 공법에 위배된다며 놓아줬다가 이들이 위치를 알려주는 바람에 부대가 거의 전멸당했다.

이로 인해 독립군 사회에서 신뢰를 잃은 안중근은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하기로 하고 1909년 ‘동의단지회’를 결성한 후 손가락을 끊어 이토 처형을 맹세한다. 영화 ‘영웅’은 안중근이 동지들과 러시아 자작나무 숲에서 손가락을 자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인에게는 원수지만 일본인에게는 영웅이다. 지금의 야마구치인 조슈 하급 무사 출신인 이토는 빈한한 출신 때문에 어려서부터 모욕과 학대를 받았지만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본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사부 요시다 쇼인이 제자로 받아 키웠다. 일본 천황을 옹립하고 도쿠가와 막부를 폐지한 후 서양 오랑캐를 물리쳐야 한다는 그의 ‘존왕양이’ 사상은 제자들에 의해 ‘메이지 유신’의 형태로 실현되며 훗날 이토가 추구한 ‘정한론’과 ‘대동아 공영론’도 모두 쇼인에게서 나온 것이다.

스승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요인 암살과 방화 등 테러를 서슴지 않던 이토는 1862년 영국 유학에 이어 1871년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과 유럽 등지를 돌아보고 온 후로는 서양 문물을 수용하는데 누구보다 적극적인 개화파로 변신한다. 서양의 선진 문물을 배우지 않고는 부국강병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1878년까지 ‘유신 삼걸’로 불리는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가 모두 사무라이 반란인 서남 전쟁 패전과 암살, 지병으로 사망하자 이토는 유신의 실세로 떠오르며 1882년 독일로 건너가 헌법을 공부하고 1885년 초대 총리대신이 된 후 1889년 이를 모델로 한 헌법 제정에 앞장선다.

그리고 1895년 미우라 고로 일본 공사를 시켜 조선의 국모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안중근은 이토 살해 혐의로 재판을 받으며 자신이 이토를 죽일 수밖에 없는 이유 15개를 열거하는데 그 첫번째가 조선의 국모를 살해한 죄다. 영화 ‘영웅’에서 안중근은 이 15개 죄목을 노래로 부르는데 이 장면이야말로 영화의 하이라이트다. 안중근이 이토를 살해한 것은 공개 법정에서 조선 독립의 대의와 이토 살해 이유를 만방에 알리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안중근은 옥에서 죽을 때까지 동양의 평화와 조선 독립의 필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동양평화론’을 썼는데 이는 이토의 ‘정한론’과 ‘대동아 공영론’과 양립할 수 없다. 세상을 보는 정반대의 시각이 하얼빈에서 만났고 그 결과가 이토의 사망인 것이다.

한국에서 새롭게 일고 있는 독립 투사에 대한 관심이 나라가 망해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조선의 독립과 민족의 번영을 꿈꾸던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계기가 되길 희망한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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