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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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마지막까지 재미있게

2023-01-20 (금)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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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이라는 말에 가슴이 뛴다면, 혹은 아리다면, 나이 들었다는 증거이다. 청춘의 주인공들은 청춘을 의식하지 못한다. 서툰 듯 싱그러운 그 시절의 날들이 아름답다는 건 아주 나중에야 알게 된다.

사람은 나이만큼 삶을 안다. 20대에게 서른 너머의 삶은 미지의 영역이다. 나이 들면 무슨 재미로 사나 막연히 생각할 뿐이다. 40대에게는 아마도 예순 이후의 삶이, 60대에게는 여든 이후의 삶이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길이 끝나면 새 길이 열리듯 20대 끝난 자리에서 30대를 만나고 30대 끝난 자리에서 40대로 접어들며 우리는 미지의 나이들을 살아간다. 그리고 이제 많은 이들은 100세를 맞는다. 그렇게 나이 들어도 삶은 재미있을까.

“내가 81살에 죽었다면 인생이 이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을 것”이라고 말하는 노인이 있다. 자그마한 몸집의 일본여성 와카미야 마사코이다. 봄이면 미수(米壽), 88세가 되는 그는 60대에 얻은 날개로 세상을 훨훨 난다. 그에게 붙는 타이틀은 세계 최고령 앱 개발자. 실리콘밸리로, 유엔본부로 날아다니며 강연하고 책 내며 사는 그의 80대는 신나고 재미있다.


1935년생인 마사코는 고교 졸업하자마자 미쓰비시 은행에 취직해 40년 일하고 정년퇴직했다. 은퇴생활은 답답했다. 비혼인 그는 90세 노모를 간병하느라 밖에 나가 사람들을 만날 수도 없었다. 그때 어느 잡지에서 컴퓨터가 있으면 집에서도 사람들과 채팅할 수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 길로 컴퓨터를 샀는데, 그 한 번의 샤핑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컴맹이었던 그는 3개월을 고군분투한 끝에 컴퓨터를 익히고 인터넷에 접속하는 법을 배웠다. 마침내 세상과 연결되었을 때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났다고 했다. 온라인 실버클럽에 가입해 사람들과 사귀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는 세상으로 복귀했다. “날개를 얻은 것이지요. 그 날개가 나를 세상으로 날아가게 했어요.”

날개에 동력을 준 것은 그의 못 말리는 호기심이었다. 이 마술의 날개를 어떻게 쓰면 더 재미있을까- 그는 끝없이 궁리했다. 그 결과가 엑셀 프로그램으로 다양한 패턴의 소품을 만드는 프로그래머, 노인용 아이폰 게임을 만든 앱 개발자로서의 삶이다.

노모가 100세로 세상을 떠난 후 그는 틈만 나면 노인들에게 스마트폰 사용법을 가르쳤다. 디지털 기기를 써야 노년의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노인들이 게임을 하면 스마트폰과 더 쉽게 친해질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젊은 엔지니어에게 노인용 게임개발을 의뢰했다. 젊은이는 “도와드릴 테니 직접 해보시라”고 권했다.

그날로 원격 지도를 받으며 6개월 간 머리를 싸매고 코딩을 배워 만든 것이 ‘하나단’이다. 일본의 전통 인형놀이를 본뜬 게임이다. 2017년 82세에 게임 앱을 출시하고 나자 초청장이 날아왔다. 애플이 개최하는 연례 세계 개발자대회에 팀 쿡 CEO가 할머니를 초청한 것이었다. 이어 2018년에는 “노인들에게 디지털 기술은 왜 중요한가?”를 주제로 한 유엔 회의에서 기조연설을 했다. 생각지도 못한 진기한 경험들이 이어지자 “나이 들수록 인생이 점점 재밌어지네요” 등 책도 몇권 냈다.

80대 독거노인인 그의 삶이 어떻게 이렇게 신나졌을까. 삶을 대하는 독특한 자세 때문일 것이다. 끝없는 호기심, 왕성한 창의력, 겁 없는 도전정신 - 나이를 잊어버린 활기참이다.

나이 들면 ‘편한 게 최고!’라는 말들을 한다. 따뜻한 안방에서 꼼짝 않고 누워 지내는 것 같은 편안함이다. 기대수명이 80 정도라면 아마 그렇게 살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백세 시대. “운 나쁘면 100살까지 산다”는 농담이 오간다. 노화로 심신이 병든 상태로 계속 살아야 한다면 장수는 고역이자 고욕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100살까지 살 것에 대비해 건강을 챙기는 것이 노년의 과제이다.


노년은 아무 것도 안 해도 누가 뭐랄 것 없는 일종의 해방기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스트레스라고 한다. 적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가 노화를 늦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호주 시드니, 백년 연구소의 한 연구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성인남성들을 대상으로 병원침대에서 꼼짝 않고 5~7일 누워있게 하니 근육 0.5 킬로그램이 사라졌다. 안 쓰면 퇴화하는 것이다.

한편 우리의 뇌는 나이 40 이후부터 매 10년마다 5%씩 축소되고 70살이 넘으면 빠르게 쇠퇴한다. 이때 달리기나 걷기 수영 등 유산소 운동을 하면 혈액이 온몸으로 힘차게 분출되면서 뇌 수축 속도가 느려져 뇌 나이를 4년 정도 젊게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심신에 가해지는 적당한 스트레스는 면역시스템도 활성화한다고 하니 스트레스가 약이 된다.

노년의 고인 물 같은 삶에 자극이 필요하다. 차일피일 미뤘던 요가/조깅도 시작하고 엄두가 나지 않던 외국어/악기/그림 공부도 시작해보자. 나중에 ‘써먹을 수 있을까’ 같은 생각은 하지 말라고 마사코는 조언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조언한다. 노년에 실패를 한들 뭘 얼마나 잃겠는가. 무엇이든 시작만 해도 ‘성공’이라고 그는 못 박는다.

노년에는 좀 무모해 봐도 좋겠다. 과감하면 좋겠다. 삶이 끝나는 그날까지, 재미있는 인생을 위하여.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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