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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경락의 법률 칼럼 - 책임 면제서(liability waiver)

2023-01-18 (수) 손경락/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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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겨울철 스포츠인 스키 시즌이 돌아왔다. 무릇 스포츠란 게 어느 정도 위험 요소가 다 도사리고 있지만 특히 높은 산 정상에서 빠른 속도로 내려오는 스키나 스노보드는 부상당할 위험이 상대적으로 크다.

스키장 측은 이에 대한 자구책의 일환으로 리프트 이용권 발권 시 입장객에게 책임 면제서(liability waiver)에 서명을 요구한다. 혹시 스키를 타다 다치더라도 스키장을 상대로 소송을 걸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일종의 면책 계약서인 셈이다.

의료비가 비싼 미국에서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소송 중 하나가 신체적 피해를 입었을 때 누구에게 잘못이 있는지 따지는 것인데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 이 책임 면제서다. 아이들이 풋볼이나 야구, 농구 같은 운동경기에 참여할 때나 심지어 학교의 소풍, 놀이공원, 크루즈 여행처럼 스포츠와 별 상관없는 경우에도 면책서는 빠짐없이 등장하는 약방의 감초다.


그렇다면 이 면책서가 정말로 모든 소송을 막아주는 만병통치약이 될 수 있을까? 답은 “그때그때 달라요”다. 그럼 경우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 한번 살펴보자.
이런 소송이 제기되면 법원 판사들은 면책서의 내용을 제일 먼저 본다. 단적인 예로 “이용자는 스키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고에 대해 스키장을 상대로 책임을 묻지 않는다”라는 식의 면책서는 아무런 효력이 없다.

왜냐하면 스키장 업주와 입장객의 관계는 한쪽은 시설을 제공하고 다른 일방은 돈을 주고 이를 이용하는 계약 관계인데, 법이란 게 원래 상식에서 출발한다고 보면 계약 당사자 한쪽에만 유리하게 보편적 면책을 인정해주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부연하자면 스키장 슬로프에서 넘어진다든가 트레일에서 벗어나 부상을 입는 정도의 위험은 스키장 이용자라면 누구나 각오한 터이겠지만, 스키장의 관리부실로 지붕 밑에 얼어있던 고드름이 떨어져 머리를 다친다든가 구내식당에서 먹은 음식 때문에 식중독에 걸리는 등의 위험까지는 수용하려 들진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 면책이 되는지 자세한 설명과 함께 이용자로부터 그런 위험 가능성에 대한 동의가 있어야 한다.

또, 아무리 합당한 면책서라 하더라도 깨알 같은 글씨로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적어놨다면 이것 역시 상식에 벗어나 법적 효력을 인정받기 어렵다.
다음으로 따지게 되는 것은 이용자가 면책서의 내용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듣거나 외부의 압력 같은 것 없이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충분히 이해하고 동의했는지 여부이다.

이용자에게 한마디 설명도 없이 면책서를 들이밀며 “이거 아무것도 아니니 그냥 사인하시면 돼요”라고 안내한다든가 영어를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영어로 된 면책서에 무작정 사인을 강요한다면 소송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요건에 맞게 면책서가 작성되었고 이용자가 위험에 대해 충분히 예견하고 동의했을 때 법원은 과연 이용자의 부상이 면책서에 명시된 상황과 부합하는지 보게 된다. 예컨대 이용자가 “리프트 이용 과정에서 생긴 부상에 대해선 스키장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라고 된 면책서에 사인을 하고 그만 리프트에서 내리다 기계의 오작동으로 넘어져 부상을 입었다고 가정했을 때, 과연 이 부상이 면책서에 명시된 상황인가를 대조, 판단한다는 뜻이다.

이때 합당한 면책서가 있는 데다 이용자의 안전을 위해 주의를 다한 사업주라면 법의 보호를 받는 게 마땅하다.
그러나 잘 쓰여진 면책서만을 믿고 스키장의 경사나 커브가 아주 심한 구간에서 사람들이 반복적으로 부상을 당하고 있는데도 이를 방치하고 개선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스키장은 업무상 중과실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법은 상식에서 출발하므로 항상 반대편 입장에서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법을 이해하기 쉽다.

<손경락/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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