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니 살림은 바뀐게 없구나!”
5년 만에 한국에서 온 친구들이 내 살림을 해주며 하는 말이다.
한국에서 가져온 스텐냄비는 손잡이가 흔들거리지만 2개가 남아있고 남편이 일본 출장길에 사온 부엌칼은 짜리몽땅하지만 쓸만하다. 대학 다닐 때 집에 오던 미제 아줌마한테 엄마가 결혼 때 사준 100개가 넘는 오만가지 유리잔은 아직도 15개쯤 남아서 진짜 미제는 튼튼한 걸 증명하며 나하고 수명을 같이 할 것 같다. 내 살림 꼬라지를 보더니 다음날 한국 마켓에서 길고 커다란 스텐국자와 반짝이는 칼을 사서 숫돌에 삭삭 갈면서 살림을 시작한다.
내가 좋아하고 할 줄 아는 것만 하는 나와는 달리 친구들은 솜씨가 좋아서 무엇이든 척척인 살림의 여왕들이다. 이래서 난 친구가 오면 살림을 놓아버린다. 처음 며칠은 푹 쉬려나 했는데 쌩쌩하다며 다음날부터 바다로 산으로 뉴욕으로 셰넌도어 가을산으로 워싱턴 DC 미술관까지 도토리 할머니들이 다 접수했다. 집안 일은 해놓으면 별 표시가 없지만, 안하면 바로 표시가 나서 이게 없네, 저거는 어디 있냐고 불평을 한다
친구들이 가고나면 나는 무릎수술을 해야하니 두고두고 먹어야 한다며 겨울살림을 시작한다.
아파트에 사는 한국 친구들에게 우리 집은 가을이 한창이라 할 일이 엄청 많았다. 우선은 텃밭에 있는 고추, 가지, 토마토, 호박을 모조리 따고 넝쿨을 뽑아내어 산같이 쌓아놓더니, 한국 고깃집에서 주는 양파 고추 절임을 쉽게 만드는 비법으로 만들고, 매운 고추는 쫑쫑 썰어 작은 지퍼백에 담고, 그 많은 고춧잎을 얌전히 따고 삶아서 지퍼백 수십개씩 담았다. 웬일인지 2년째 대풍년으로 그동안 건조기에 말렸던 고추를 한자루 싣고 물어 물어 버지니아까지 찾아간 방아간에서 빻아온 고추가루 몇 통은 누구에게나 자랑하며 아껴 쓴다. 뒷마당에 숨어있는 부추도 뽑아서 부추전도 해먹고 늙은 호박도 속을 박박 긁어 호박전도 한다.
대추도 따고, 단감도 따고, 잔디밭 잡초도 뽑다가 내가 담은 햇빛에 까맣게 된 된장을 보며 혀를 끌끌 차더니, 3일에 걸쳐 메주콩을 한 들통 삶아서 방망이로 온종일 찧고 찧어 비비고 치대어 넣어 한 항아리 가득 새 된장을 만들어준다.
여러모로 비교해보니 미국은 기본적인 식료품은 거의 변동이 없이 항상 같은 값이고 품질도 좋다. 한국은 제철 야채나 과일도 수확량에 따라 가격변동이 심해서 금김치 금쪽파 금갈치 금사과 금배라며 과일도 비싸다. 한국 망고 1개값으로 여기선 한 박스를 살 수 있다기에 애플망고, 노란망고, 타미망고를 몇 박스씩 익는대로 신나게 한달 내내 먹었고, 고소하지만 비싸다는 아보카드도 나랑 남편까지도 몇 자루를 먹었다.
미국 소고기는 돼지고기와 값이 별 차이가 없다는 선한 거짓말에 넘어가 친구들은 소고기를 온갖 방법으로 먹고 또 먹었다. 싱싱한 배추와 무로 석박지 김치도 담았고, 고무줄에 6개씩 묶인 파 가격에 놀란 친구들이 한국에 가서 보내준 쪽파김치랑 고들배기 사진을 보며 입맛 없을 땐 밥을 먹는다.
저녁마다 카톡으로 만나는 미국간 마누라를 그리워하는 한국의 남편들에겐, 남이 해 준 음식이 제일 맛있다며 무조건 사먹어라고 하고, 우리도 밖에선 한국음식 빼곤 다 사먹었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빨간 게무침과 간장게장도 못해줬고, 막걸리 찐빵도 못 만들어줬다고 아쉬워하는 친구들이 떠나고, 알러지 땜에 못 먹는 망고를 버리고, 커다란 국자와 들통을 넣으며 친구들을 그리워한다.
우리 집 김치냉장고, 냉동고, 냉장고가 터져나도록 반찬을 해놓고, 마당엔 된장을 한 항아리 가득 만들어 주고, 텃밭과 잔디밭까지 깨끗하게 정리를 해주니 겨울이 와도 할일이 없다. 그나마 치워야하는 낙엽도 바람이 휘몰아치며 큰길로 쓸어가버리니 이제 눈이 내리길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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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희 / 전 한국학교 교사,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