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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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땅

2023-01-16 (월) 데보라 임 / 산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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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우기다운 비가 내리고 있다. 그렇게도 목말랐던 땅이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이제야 촉촉한 피부를 드러낸다. 날씨가 제법 푸근해져 오랜만에 마당에 나왔다. 잔디와 쑥, 상추와 아욱의 새순들이 애교스런 예쁜 그린으로 나를 반기고, 손가락을 쑤욱 들이 밀어보니 땅은 문을 활짝 열어 기분 좋은 흙 내음을 뿜어준다.

예전 집들은 7년을 채 살지 못하고 이사했기에 예쁜 꽃과 나무를 심어 한창 첫사랑을 나눌 즈음 헤어져 많이 서운했었다. 그래서 이번 집은 이사 온 지 5년이 넘도록 마당을 가꾸지 않았는데 언젠가부터 나를 다시 마당으로 불러냈고, 시간이 흘러 이제 제법 여러 과일나무들과 꽃, 채소들로 둘러져있다.

어찌나 돌짝 땅과 씨름을 해대었는지 손목 관절이 성하질 못해 주사를 맞으면서도 또 마당에 살고 있는 나는 아마도 땅의 매력이 주는 묘한 중독에 빠져있는 듯하다. 가만히 마음을 기울여 땅의 소리를 듣노라면 여러가지 교훈을 말해주기에 나는 땅을 위대한 스승이라 칭한다.


말없이 입을 벌려 물만 머금으며 침묵하는 겨울의 기다림을 땅은 다음을 기약하는 쉼이라 말한다. 이 기다림 속에서 성장점이 살아 숨 쉴 수 있음을 알려주는 땅의 가르침을 따라 나도 마당 쉼터에 앉아 묵언의 침묵 속에 내 몸을 맡기며 큰 숨으로 삶의 기다림을 연습해본다. 쉼이란 단절이 아닌 자칫 정지될 듯한 내 삶을 이어주는 다리이며, 기다림이라는 터널을 지나 또 다른 성장의 시작이 되어줄 것을 믿기 때문이다.

무엇을 심어도 마다하지 않고 깊은 뿌리를 내리며 무성한 잎과 꽃을 피워 결국은 열매를 선사하는 땅은 무엇보다 정직하다. 그런데 막상 땅이고 싶은 내 마음은 편견이 심하고, 거짓되며, 심히 부패하여 합당한 열매를 내어주지 않는 변질된 땅이 되어버렸다. 마음에 퍼져만 가는 잡초를 제거하지 않았고, 번져가는 병충해만을 탓했다. 꾸준한 영양을 공급하지 않고 튼튼하지 못한 연약한 줄기만을 원망했다. 작은 꽃에는 무심하고 관심 없는 눈길만을 주었고 오직 예쁘고 큰 꽃의 화려함만을 바라보았다. 그러기에 수확이 없을 때 열매는 거저 맺히지 않음을 교훈해주는 땅의 목소리를 다음 해, 또 그 다음 해에도 들어야했다.

아, 나는 내 마음이 땅이고 싶다. 구하지 않은 유익한 것까지도 내어줄 수 있는 내 마음이고 싶다!

<데보라 임 / 산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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