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 되느니라”(마태 9:17)
새해, 새로운 출발점에 서니 마태복음의 구절이 떠오른다. 2022년도 어려운 한해였다. 전쟁으로 삶이 파괴된 우크라이나, 정치적 탄압에 맞서 목숨 걸고 싸우는 이란 중국 등지의 국민들이 특히 그러했다. 그에 비하면 미국에서의 삶은 평온했다. 하지만 치솟는 물가와 경기침체 불안감, 수그러들지 않는 팬데믹으로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위협받았다. 특히 지난가을부터는 코비드-19 변종이 기승을 부려 많은 이들이 몸져눕고 후유증으로 고생했고 목숨을 잃었다.
확률로 보면 부지기수의 아슬아슬한 고비들을 넘기며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 섰다. 그리고 2023년이라는 미지의 시간을 맞는다. 새 날들, ‘새 포도주’를 어떤 부대에 담을 것인가.
지금은 포도주를 나무통/오크통에 담아 숙성시키지만 고대 중동에서는 가죽부대에 넣었다. 그리고 종종 발효가 덜 된 포도주가 부대 안에서 발효되면서 탄산가스가 차올라 부대가 팽팽해졌다. 이때 새 가죽부대는 신축성이 좋아 압력을 버티지만 딱딱하게 굳은 헌 가죽부대는 터져버리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
포도주는 경험, 부대는 사람/존재로 보면 무난할 것 같다. 신앙 등 경험의 씨앗들이 사람 즉 마음과 영혼의 밭에 심어지면서 인생 드라마는 형태를 갖춘다. 경험과 밭이 제각각이니 똑같이 하루 24시간을 살아도 시간의 무대 위에 펼쳐지는 드라마는 천차만별이다. 왜 누구는 건강하고 행복하게 장수를 누리고, 누구는 불행하게 살다 일찍 생을 마감하는가. 무엇이 그런 차이를 만드는가.
당장 나오는 답은 ‘유전자’이다. 행복감, 건강, 장수를 선천적으로 타고난 사람들이 있다. 유전자 로토 당첨자인 이들은 즐겁고 행복하다. 어려움이 닥쳐도 허허 웃으며 긍정적 해결책을 모색한다. 반면 같은 어려움 앞에서도 세상이 무너질 듯 절망감에 싸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비관적이고 우울하다. 유전자가 개개인의 행복 정도에 미치는 영향은 대략 40% 크게는 50%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나머지 40% 정도는 선택의 문제.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삶이 행복할 수도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행복 유전자를 갖지 못했다고 너무 억울해할 건 아니다.
“어떻게 하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를 심도 있게 다룬 연구로 ‘하버드 성인발달 연구(Harvard Study of Adult Development)’가 독보적이다. 1938년 하버드 2학년 남학생(당시는 여학생 입학불허) 268명을 대상으로 시작된 연구는 1970년대 보스턴 도심의 저소득층 청년 456명을 추가하고, 이후 그 아내들을 포함시켰다. 이어 근년 그들의 성인자녀들(50대 60대) 1,300명을 참가시키며 연구범위는 계속 확장되었다. 처음 참가자들 중 50여명이 90대 중반의 삶을 살고 있다.
80여년에 걸쳐 참가자의 건강은 물론 결혼 직업 대인관계, 그 성공과 실패 과정 등 삶의 전반을 추적한 연구는 뜻밖의 사실들을 밝혀냈다. 연구진도 상상 못한 놀라운 사실들이라고 연구소장인 로버트 월딩어 박사는 말한다. 예를 들면 “지금 50살인 사람의 30년 후 건강상태를 가장 잘 예측할 수 있는 요소는?”이란 질문. 정답은 콜레스테롤 수치나 체중 혹은 혈압이 아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이다. 50살 때 가족친지들과의 관계에 가장 만족했던 사람들이 나이 80에 가장 건강했다고 그는 말한다. 따뜻한 관계가 정신건강을 넘어 몸의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처음 연구 당시 공감이나 애착 등 감정적 요소는 관심 사안이 아니었다고 이전 연구소장이었던 조지 베일런트 박사도 말한다. 그런데 연구를 진행해보니 건강하게 나이 드는 비결은 첫째도 관계, 둘째도 관계라는 것이다. 특히 배우자와의 관계가 중요해서 만족스런 결혼생활은 정신건강을 지키는 효과가 있다. 예를 들어 결혼생활이 행복한 80대는 질병으로 고통이 심할 때도 기분은 크게 상하지 않는다. 반면 결혼생활이 불행한 사람은 고통을 더욱 심하게 느낀다. 친밀한 관계는 인생전반에 걸쳐 어려움을 이겨내게 하고, 심신의 노화를 늦춰주며 건강과 행복을 보장한다고 연구진은 말한다. 그에 비하면 돈이나 명성이 주는 행복감은 일시적이다.
그러니 새해에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어떤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을 것인가. 첫째는 관계 보살피기. 성공을 위해 일에 온 정열을 쏟는다면 그 또한 존중받아야 할 선택이다. 하지만 대가가 따른다. 관계의 망에 구멍이 뚫릴 수밖에 없다. 둘째는 가치 선별. 가치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과감하게 잘라내고 자신이 가치를 느끼는 일이나 사람, 감정에 시간과 에너지를 집중하는 것이다. 셋째는 금연 절주 운동 건강식 등 건강수칙 지키기. 월딩어 박사는 “100년 동안 쓴다는 마음으로 몸을 돌보라”고 충고한다.
정신과전문의이자 선 구도자이기도 한 그는 연구결과를 본 후 “매일 명상하고, 관계들에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신축성 좋은 가죽부대, 비옥한 마음 밭을 가꾼다면 어떤 낯선 경험이 찾아들어도 걱정할 게 없다. 2023년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이다.
<
권정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