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흥진의 영화이야기 - 새 영화 ‘리빙’(Living) ★★★★ (5개 만점)
▶ 어머니들의 숙원 놀이터 만들며 공무원의 짧지만 진짜 삶 그려
윌리엄스 씨는 6개월 시한부 삶을 통보 받고나서야 삶다운 삶을 살기로 한다.
당신이 앞으로 6개월 밖에 더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당신은 그 6개월을 어떻게 살겠는가. 수 십 년간 관료체제에 젖은 채 서류 더미에 싸여 같은 일을 반복하던 런던의 구청 과장 윌리엄스 씨(빌 나이)는 만사를 제쳐놓고 동네 어머니들의 숙원인 어린이 놀이터를 만들어주기로 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그는 비로소 짧지만 진짜 삶을 살게 된다.
이 심각하고 진지한 영국영화는 일본의 거장 아키라 쿠로사와가 만든 1952년작 ‘이키루’(Ikiru-산다는 뜻)의 리메이크로 각본은 노벨상 수상작가인 카주오 이시구로가 썼고 감독은 올리버 허마너스.
‘이키루’의 주인공은 도쿄달동네 구청의 시민과장 와타나베(쿠로사와의 단골 배우 타카시 시무라). 그는 의사로부터 위암으로 앞으로 6개월 밖에 못산다는 통고를 받고나서야 사람다운 삶을 시작한다. 모기가 들끓는 동네 시궁창을 덮 고 그 위에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를 짓기로 결심한다. ‘이키루’는 와타나베의 숨 막힐 것 같은 무기력한 삶으로부터 역동적 인간에로의 변신을 우수와 비감 속에 서술한 생명 찬가이다. 준수한 흑백 명화로 꼭 보기를 권한다.
‘리빙’의 시간대는 1953년. 자기에게 무관심한 아들 마이클(바니 피시윅)과 마이클의 아내 피오나(팻시 페란)와 함께 사는 윌리엄스 씨는 구청의 공공시설과 과장. 수 십 년간을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더미 속에 묻혀 들어오는 민원을 다른 과로 돌리는 것이 다반사다. 책임 회피의 챔피언인데 어찌나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모습과 행동을 하는지 ‘좀비 씨’라 불린다.
영화는 아직 관료체제에 채 물들지 않은 신입공무원 피터 웨이클링(알렉스 샤프)의 눈으로 묘사된다. 의사로부터 6개월 시한부 삶을 선고 받은 윌리엄스 씨는 저금한 돈을 인출해 직장도 결근하고 바닷가를 찾아간다. 그리고 여기서 쾌락과 유흥에 통달한 2류 작가 서덜랜드(톰 버크)를 만난다. “조금만 살아 보세요”라고 권하는 서덜랜드에게 윌리엄스 씨는 “난 사는 방법을 몰라”라고 대답한다. 서덜랜드는 이런 읠리엄스 씨를 데리고 유흥가와 환락가를 섭렵한다. 윌리엄스 씨가 한 술집에 들러 슬픈 곡조의 민요를 부르는 장면이 콧등을 시큰하게 만든다. 서덜랜드는 아버지의 유산을 받을 생각에 여념이 없는 윌리엄스 씨의 아들 마이클 보다 훨씬 나은 아들인 셈이다.
윌리엄스 씨에게 뒤 늦은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또 다른 사람이 의미 없는 관료체제 하의 직장에 다니다 좀비가 될 것이 두려워 직장을 떠난 같은 과의 젊은 여직원 마가렛(에이미 루 우드). 윌리엄스 씨는 마가렛의 조언과 도움으로 삶의 생기를 얻는다.
그리고 윌리엄스 씨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숙원인 폭탄을 맞아 폐허가 된 공터에 어린이 놀이터를 지어주기로 결심한다. 이를 위해 그는 서류 결재를 차일피일 미루는 담당과에 찾아가 결재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안 떠나겠다며 버틴다.
영화 후반부는 윌리엄스 씨의 사망 후 그가 어떻게 끈질기게 버텨 놀이터를 완공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면서 아울러 과 직원들의 윌리엄스 씨에 대한 회상으로 진행된다. 윌리엄스 씨는 놀이터 건설을 하면서 산송장 같은 인간으로부터 행동과 실존적 인간으로 변용되고 또 자기구제를 성취한다.
품위 있고 엄숙하고 감상적이며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우아한 영화인데 쿠로사와의 것에는 못 미치지만 차분하게 잘 만든 작품이다. 특히 볼만한 것은 윌리엄스 씨 역의 빌 나이의 연기다. 엄격하고 절제 됐고 가슴을 파고드는 아름다운 연기로 그는 이 역으로 LA영화비평가협회로부터 2002년도 최우수 남우로 뽑혔고 골든 글로브 남우주연상(드라마 부문) 후보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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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진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