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책은 읽지 않는데, 나오는 책은 더 많아지고 있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읽어야지 하며 사 뒀거나, 받아 놓고 미처 읽지 못한 책이 적지 않다.
10년 넘게 미뤄 뒀던 책 한 권을 편다. 책을 쓴 화가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다. 신문 등에 발표된 글을 중심으로 모은 것인데 거의 자전적 내용들이다. 이 짧은 글 모음이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후대가 평가하는 친일과 당시 세대가 겪은 친일의 차이-. “그 시대를 산 사람 말고 누가 그 시대를 안다고 말할 수 있으랴”라는 항변이 친일, 일제 청산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내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 소설 한 권은 될 것”이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은 20대 청춘에게서였다. 그런 말을 하기에는 너무 젊은, 같은 또래였다.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산업화 시대를 연 개발연대에 무작정 상경했던 시골 청년. ’화려한 도시, 초라한 골목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는 조용필의 ‘꿈’을 이미 몸으로 겪었다는 말일 것이다. 세상은 이런 체험의 자서전들로 엮여 져 있다.
생각해 보면 책 중에는 자서전이나 전기 류가 많다. 한 세대를 이끌었던 자전적인 글이 있는가 하면, 책 제목이 널리 회자되던 기업인의 책도 있다. 정치인들이 후다닥 펴낸 용도가 뚜렷한 자서전은 흔하다. 이제 자서전 한 권을 남기고 홀연히 세상을 떠난 주위 분들도 있다. 어쩌면 우리는 매일 입으로 자서전의 일부를 말하며 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뜻밖에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도 한 권이 있다. 어떻게 왔지? 미처 경로가 기억나지 않지만 출판연도를 보니 실권이 아들에게 넘어가고 권력에서 소외돼 있을 때였다. 당시 그를 만났던 한 인사에 따르면 권력을 놓게 된 그는 오래 된 일본 연속극 비디오를 돌려 보며 소일하고 있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이 자서전은 아주 시간이 남아 돌 때가 아니고서야 볼 것 같지 않다. 그 보다 읽고 싶은 책들이 있다.
회고록이라고 과거를 쓰는 것만은 아니다. 과거를 빌어 적극적으로 현재를 말하기도 한다. 어떤 자서전은 그래서 정치적이다. 그럴 수도 있겠으나 일생을 정리하는 회고록에 남길 가치가 있는 내용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자서전의 꾸밈없는 말이 오히려 진솔할 때가 있다. 평소 글을 써보지 않았을 구순의 어느 분이 펴낸 자서전은 담담하게 흘러간다. 어법은 서툴지만 그 속에 보석 같은 경험들이 섞여 있다. 그 말고, 다른 이에게서는 듣기 힘든 미국 이야기들이다. 글의 감동은 글 솜씨가 아니라 팩트에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 보게 된다.
많은 자전적인 글을 접하다 보면 여기 나의 이야기 하나를 더 보탠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수 천권의 시집이 꽂힌 책방의 서가 앞에서 기가 질리는 것과 같다. 저 수많은 찬란한 기쁨과 슬픔에 또 하나의 기쁨과 슬픔을 더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자서전에 대해 이런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소망 소사이어티에서 나온 구술 자서전 ‘바람꽃’을 읽었다. 20분의 삶이 남가주 문인 10분의 재능 나눔에 의해 펴져 있다.
책에 담긴 삶에는 공통점이 읽힌다. 전쟁은 참혹한 과정을 통해 한 민족을 집단적으로 단련시켰다. 전후 세대라고 어려움이 없었을 것인가. 수많은 관계, 뜻밖의 건강 문제등에 이민이 더해지면서 한 권의 소설 같은 일대기가 이어진다. 단련을 통해 강인해지고, 신앙을 갖게 되고, 마지막은 나눔에 이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책에 실려 있다.
웰다잉에서 시작해 웰에이징과 웰빙을 포괄하게 된 소망의 지난 15년 사역은 5,000명이 넘는 나눔에 의해 이뤄졌다고 한다. 어느 커뮤니티에서나 의미있는 일은 그 구성원들의 나눔이 이뤄 나간다.
당연하게 여기던 것이 감사하고, 혼자 힘으로 여기 온 것이 아님을 알게 될 때 나눔을 생각하게 된다. 받은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 때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야 할 때는 이런 생각이 어렵다. 뒤돌아보고,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시간이 되면 가능할 것이다. 사람에게 나눔의 DNA가 있다는 말을 믿는다. 계기가 있으면 나타나기 시작한다. 물꼬를 터주면 모이게 되고, 한데 모인 나눔이 여러 곳에서 일을 벌인다. 이런 자서전은 나눔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매듭이 풀리지 않았던 지난 일을 회고하면서 과거와 화해할 수 있었다는 이도 있다. 들은 말을 글로 옮겨 적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창작 과정을 거쳐야 한다. 여기에는 산고가 따른다. 하지만 남의 속 깊은 이야기를 오롯이 들을 수 있는 기회 또한 흔한 것은 아니다.
자서전 쓰기가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아들이나 딸이 쓰는 부모의 자전적 글도 있다고 들었다. 한인사회에 이런 글이 모이면 이민사의 증언, 자료가 될 수 있다. 그 일은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몫이 될 것이다. 솔로몬의 영화가 미치지 못하는 들꽃 하나의 이야기, ‘보통 사람의 대단한 이야기들’이 이민사회에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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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