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말부터 두어 주 한인사회는 한바탕의 신선한 열기에 휩싸였다. 월드컵 열풍이었다. 코비드 감염 걱정과 경기침체 우려로 가라앉았던 타운 분위기가 한순간에 활기로 넘쳤다. 경기 있는 날마다 LA 한인타운 곳곳은 ‘대~한민국’ 외치며 함께 관전하는 한인들로 생동감이 넘쳤다. 16강 진출에 한 마음으로 감격하고, 8강의 높은 벽 앞에서 한 마음으로 아쉬워하며 우리는 오랜만에 하나가 되는 감동을 맛보았다.
미국주민인 우리가 왜 그렇게 한국대표팀을 응원했는지, 우리는 안다. 고국 떠난 지 수십년 되어도 여전히 그들이 ‘우리 선수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라는 느낌은 깊고도 원초적이어서 따지고 분석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우리’와 ‘그들’을 가른다. ‘우리’에 속하지 않는 ‘그들’을 막아내고 공격함으로써 인류의 조상은 살아남았고, 그 유전자는 낯선 자에 대한 경계심으로 우리 안에 뿌리박혀있다. 인종, 성별, 종교, 출신지역, 계층, 성적지향 등 우리와 조금만 다르면 끼어드는 선입관, 편견, 배타심의 배경이다.
다인종 다문화 사회인 미국에서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되려면 다양한 집단들이 공히 목소리를 가져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대통령이나 연방의원 등 고위 공직자를 생각하면 당장 떠오르는 이미지는 여전히 부유한, 백인, 남성이다. 246년 미합중국 역사상 흑인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가 유일하다. ‘백인’이며 ‘남성’인 기득권 세력이 쌓아올린 ‘우리’의 장벽은 공고했고, 유색인종이나 여성 등 소수계는 선입관과 편견으로 밀쳐졌다. 그 결과는 오랜 세월 소수계가 자신들의 필요와 권익을 대변할 ‘우리 대표’를 갖지 못했다는 것. 차별과 불공정의 역사는 길었다. 그런데 이제 바뀌고 있다. 변화들이 눈에 띈다.
이번 주 LA는 사상 첫 여성시장을 맞았다. 지난 12일 취임한 캐런 배스 43대 시장은 LA 241년 역사상 첫 여성시장이자 두 번째 흑인시장이다. 여성이 시장이 되는 데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취임선서를 주재한 카말라 해리스 부통령 역시 ‘최초’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최초의 여성 부통령이면서 최초의 흑인계이자 아시아계 부통령이다. 세상의 주체는 남성, 여성은 종속적이고 부수적 존재라는 편견이 조금씩 허물어지면서 나온 변화들이다.
2022 중간선거는 미 전역에 여성 바람을 몰고 왔다. LA에서는 여성 시장과 더불어 하이디 펠드스틴 소토 신임 검사장이 취임했다. 시 역사상 최초의 여성 시검사장이다. 15석의 시의회 역시 11월 선거 결과 여성 시의원이 6명으로 늘었다. 역대 최다 기록이다. 1850년 시작된 시의회 역사를 통틀어 지금까지 시의원이 되어본 여성은 23명에 불과하다.
배스 시장은 “오랜 기간 시의원은 전원 남성이었다”고 감회에 젖으며 여성 시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말했다. 시민 전체를 위해 일할 책임에 더해 또 다른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 자신을 바라보며 자랄 소녀들에 대한 책임감이다.
연방의회 선거에서는 플로리다의 맥스웰 프로스트라는 청년이 ‘최초’ 기록을 세웠다. 25세인 그는 Z세대 최초의 연방하원의원이다. 밀레니얼 다음 세대인 Z세대는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 출생한 젊은이들. 미국 인구의 27%를 차지하며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세대이니 앞으로 이들의 입김은 강할 수밖에 없다. 사회적 경제적 인종적 정의실현 운동에 적극 나서온 프로스트는 젊은 세대의 정치 무관심에 신선한 충격을 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의원님’인 그가 최근 아파트를 구하지 못해 곤경에 빠졌다. 1월부터 연방의회로 출근하려면 거처를 얻어야 하는데 입주 신청을 했다가 퇴짜를 맞았다. 낮은 크레딧 점수가 문제였다. 출마를 결심하면서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우버 운전을 했다. 엄청난 선거비용을 감당할 길이 없었다. 기부를 받기는 했지만 태부족. 1년 반 선거운동하는 동안 카드 돌려막기로 버티다보니 빚은 쌓이고 크레딧 점수는 엉망이 되었다.
애초에 그는 처음 몇 달은 이집 저집 카우치를 전전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의사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과히 비싸지 않은 아파트가 나와 입주신청을 했다. “신용점수가 낮다”고 미리 말했지만 아파트 관리직원은 “상관없다”고 했다. 결과는 50달러의 신청비만 날리고 입주를 거절당한 것. 없는 이들에게 50달러는 그냥 날려도 되는 액수가 아니라는 걸 그는 잘 안다.
부유한 ‘의원님들’은 절대 경험하지 못할 낭패를 그는 겪었고, 의회에 나가면 서민층의 주거문제부터 짚을 생각이다. 과도하게 비싼 렌트비, 신청비 마구 걷어 운영비로 쓰는 아파트 임대업계, 신청절차를 통해 유색인종(그는 아이티와 푸에르토리코 태생이다)을 교묘하게 걸러내는 관행 등으로 상처 입은 주민들에게 그는 ‘우리 대표’라는 동질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연방의회에 부유층과 백인들이 불균형하게 몰려있는 것은 돈과 상관이 있다. 돈이 있어야 선거운동도, 워싱턴 생활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나 가난한 인재들의 정계진출은 돈의 장벽 앞에서 원천 봉쇄되는 경향이 있다. 못 가진 자들의 어려움을 체감하는 의원들이 적을 수밖에 없다.
미국사회가 다양성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려면 모든 ‘우리’와 모든 ‘그들’이 함께 해야 한다. 편견의 벽을 허물고 소수계 대표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 과거에 비하면 많이 왔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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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