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부르는 금지된 사랑’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서양예술의 단골 소재였다. 오페라로 만들어진 작품만 꼽아도 ‘로미오와 줄리엣’(구노), ‘트리스탄과 이졸데’(바그너),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드뷔시), 파올로와 프란체스카(잔도나이, 라흐마니노프의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 랜슬롯과 기네비어(에르네스트 쇼송의 ‘아더왕’) 등이 떠오른다. 로미오와 줄리엣 빼고는 모두 유부남과 유부녀의 이룰 수 없는 사랑, 하나같이 가슴 절절한 비극이며, 결국은 모두 죽음을 맞는다.
이 가운데 음악적으로 가장 완성도가 높은 리하르트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난 9~11일 구스타보 두다멜의 지휘로 LA 필하모닉이 공연했다. 4시간이 넘는 3막의 오페라를 하루에 1막씩, 3일에 걸쳐 연주한 특별한 공연이었다. 관객들로서는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오페라를 사흘 동안 여유 있게 감상할 수 있어서 좋았고, 가수들로서는 그 힘든 바그너 노래를 충분한 기량으로 노래할 수 있어서 편안했을 것이다. 1막씩만 하는데도 인터미션 없이 한시간 반씩 소요됐다.
2004년 에사 페카 살로넨 시절에 초연되었던 ‘트리스탄 I, II, III 프로젝트’는 전통 오페라무대는 아니지만, 그 때문에 오케스트라가 피트에 들어가지 않아서 대편성의 바그너 음악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드문 기회였다.
두다멜과 LA필 오케스트라는 최고 기량의 연주를 들려주었다. 정말 얼마나 잘하던지 감탄이 절로 터져 나왔다. 이제껏 수없이 두다멜의 지휘를 봐왔고, 매번 잘한다 잘한다 했지만, 바그너마저 신들린 듯 완벽하게 연주해내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 그의 음악이 정점에 이른 것을 알 수 있었다. 올해 초 파리오페라의 음악감독으로 부임한 그가 유럽에서 열렬한 호응을 받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트리스탄 프로젝트’는 연출가 피터 셀라스와 비디오아티스트 빌 바이올라가 합작하여 오페라 무대 못지않은 퍼포먼스로 승화시켰다. 디즈니홀 곳곳의 발코니와 대형스크린 이미지를 십분 활용했는데, 특히 바이올라의 대담한 비디오 이미지는 단조로운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무대에 감정을 풍성하게 덧입혔다. 많은 물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사랑을 통한 영혼의 정화를 센슈얼하게 보여주었고, 뜨거운 불의 이미지들은 타오르는 열정과 모든 것을 소진해버리는 사랑의 완성을 표현해냈다. 3막의 끝, 이졸데의 아리아 ‘사랑의 죽음’(Liebestod)이 흐르는 가운데 육체를 이탈한 영혼이 죽음을 초월한 불멸의 사랑을 안고 영원의 세계로 솟아오르는 라스트신은 소름 돋는 전율을 선사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한때 연주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오페라다. 어렵고 무겁고 길고, 해결되지 않는 무한선율이 도무지 끝나지를 않고 감정의 고저에 따라 계속 흘러가기 때문이다. 특히 반음계의 선율이 끝없는 불안감을 조성하는 전주곡은 그 비극적이고 운명적인 분위기 때문에 많은 영화의 주제나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었다.
아리아가 많지 않고, 가사는 시적이고 철학적이며, 장중한 오케스트라 사운드가 노도와 같이 흐르는 바그너의 오페라들은 가수도 힘들고, 듣는 사람도 힘들고, 오케스트라도 힘들기 때문에 자주 공연되지 않는다. 최근 LA 오페라의 경우 데이빗 호크니 프로덕션의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2008년 공연되었고, 2010년에 4부작 ‘링 사이클’, 2013년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그리고 2021년 ‘탄호이저’ 정도가 기억나는 전부다. 거의 매년 무대에 오르는 ‘라 트라비아타’ ‘토스카’ ‘라보엠’ ‘카르멘’ 등과 비교하면 어쩌다 한번 만나는 오래된 연인과도 같다.
그런데 어쩌다 한번인데도, 바그너 오페라는 함께 감상할 파트너를 찾기 힘들다. 진짜로 바그너의 음악을 즐기지 못하면 고문과 다름없으니, 그 진수를 함께 즐길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트리스탄 프로젝트’를 ‘바그네리안’ 김용제 박사와 함께 감상할 수 있었던 것은 크나큰 행운이었다. 은퇴 안과의사이며 바이올리니스트인 닥터 김은 가끔 음악과 영화에 관한 화제가 있을 때 이메일로 의견을 주고받고 서로 좋은 작품을 추천하는 음악친구가 된지 오래다.
김 박사는 1968년 나온 데카의 명반 ‘링 사이클 전곡세트’(게오르그 솔티 지휘, 빈 필하모닉)를 처음 듣고 바그너에 빠졌다고 한다. 그러다 좋은 기회가 왔는데, 1990년 아산병원이 개원할 때 안과과장으로 초빙되어 11년간 한국에서 머무는 동안 ‘바그너 소사이어티’를 창단한 것이다.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1993년 설립한 이 단체는 바그너 소사이어티의 한국지부로 등록되었고, 그 활동 덕분에 구하기 힘들기로 유명한 독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티켓을 매년 10장씩 할당받아 연속 3년 참석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고 한다. 한국인으로는 처음 참여했던 당시 바이로이트의 분위기와 에피소드들은 언제 들어도 신기하고 흥미진진하다.
김박사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풀타임 개업의로 일하면서 ‘나성심포니’ 악장을 역임했고 ‘뮤지카 라모레’를 창설해 실내악음악회를 정기적으로 여는 등 활발한 음악활동을 계속했다. 2015년에 친지들을 모아놓고 개최한 팔순기념 콘서트를 취재한 적이 있는데 그 녹슬지 않은 실력에 무척이나 놀랐던 기억이 난다.
신비하고 아름다운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전주곡이 아직도 귓전을 맴돈다. ‘트리스탄 프로젝트’는 이번 주말 15~17일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에서 다시 한번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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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