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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 명화테러, 반달리즘

2022-11-30 (수) 정숙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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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서 한 남성이 ‘모나리자’에 케이크를 집어던졌다. 그리고 경비원들에게 끌려 나가면서 “지구를 생각하라!”고 소리쳤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을 감히 공격한 이 해프닝은 이후 환경운동가들 사이에 대유행이 되었다. 관람객이 북적이는 미술관들을 대상으로 ‘명화테러’를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7월에 영국 내셔널 갤러리에 걸려있던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복제본과 존 컨스터블의 ‘건초마차’가 타깃이 됐고, 10월초 호주 멜버른의 내셔널 갤러리에서는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e)이 기후운동가들에게 공격당했다.

10월14일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는 반 고흐의 ‘해바라기’에 하인즈 캔 수프가 던져졌고, 11월3일 로마의 보나파르테궁전 미술관에서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에도 야채수프가 투척됐다. 이틀 뒤에는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에 나란히 전시된 고야의 대작 ‘옷 벗은 마야’와 ‘옷 입은 마야’ 두 작품 사이에 두 여성이 ‘1.5℃’라는 숫자를 휘갈겨 쓴 다음 두 액자에 접착제를 바르고 손바닥을 붙여버렸다. 11월9일 호주 국립미술관에서는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 액자들이 푸른색 페인트 세례를 받았고 이외에도 보티첼리의 ‘봄’, 페이메이르의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모네의 ‘건초더미’가 공격 대상이 되었다.


명화테러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유럽의 환경단체 운동가들이다. 영국의 ‘저스트 스탑 오일’과 ‘멸종반란’, 이탈리아의 ‘울티마 제네라지오네’(마지막 세대), ‘오스트리아 마지막 세대’, 스페인의 ‘채식미래’ 등. 이들이 명화를 공격하는 이유는 사람들을 깜짝 놀래켜 주목을 끌기 위한 것이다.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다 아는 그림, 가치를 따질 수 없고 대체 불가능한 예술품을 공격하면 큰 뉴스가 되기 때문이다.

“명화 대신 기후변화와 생태위기의 현실을 보라”, “예술품은 철저히 보호하면서 지구는 지키지 않는다”, “먹을 음식이 없고 마실 물이 없어지면 예술이 다 무슨 소용인가”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그림을 공격한 후 액자에 접착제를 발라 손바닥이나 신체 일부를 붙이곤 하는데, 이 행위 역시 메시지 전달을 위해 시간을 벌려는 것이 목적이다. 가드나 경찰이 와서 끌어내려 해도 손이 작품에 붙어있으면 아세톤 용해제를 구해다 떼어낼 때까지 더 오랫동안 시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명화테러는 지난 7~20일 이집트에서 열린 27차 유엔기후변화협약 총회시기에 더 기승을 부렸다. 환경운동가들이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설치물을 훼손하는 퍼포먼스를 펼친 것이다. 13일 바르셀로나박물관에서 고대이집트 미라 진열장 위에 피와 오일을 상징하는 붉은 주스를 쏟아 부었고, 15일에는 오스트리아 빈의 레오폴트 박물관에서는 클림트의 ‘죽음과 삶’에 오일을 연상시키는 검은 페인트를 마구 뿌려댔다. 18일 파리에서는 찰스 레이의 기마조각상에 주황색 페인트를 흥건히 쏟아부었고, 밀라노의 문화공간에 전시돼있던 앤디 워홀의 BMW M1 아트 카에는 밀가루 8kg이 투척됐다.

이처럼 갈수록 과격해지는 환경단체들의 행위는 많은 이들의 우려와 비난을 사고 있다. 고흐나 모네의 그림에 식료품이나 액체를 던지는 ‘테러’는 사실상 상징적 제스처일 뿐 작품 자체가 손상된 적은 없다. 이런 명화들은 모두 특수유리로 잘 보호되고 있기 때문이다. 운동가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어서 거침없이 행동에 나서는 것이고, 이들 중 체포되거나 감옥에 간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다. 수백만, 수천만, 수억 달러에 달하는 작품들을 진짜 훼손하여 역사의 죄인이 되려는 정신 나간 활동가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나오는 이들의 퍼포먼스 동영상을 보면 섬뜩하고 충격적이다. 미라가 전시된 유리관에 핏빛 액체를 들이붓고, 은빛 기마상이 오렌지 페인트로 뒤덮이고, 워홀의 자동차에 사정없이 밀가루를 들이붓는 모습을 보노라면 파괴적인 폭력성이 느껴진다. 지구의 환경을 파괴하지 말라고 하면서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을 시각적, 감각적, 정서적으로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행위는 시위나 퍼포먼스가 아니라 반달리즘이다.

사태가 점차 심각해지면서 세계 90여개 뮤지엄의 관장들이 지난 15일 이를 규탄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대영박물관과 루브르박물관은 물론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모마, 구겐하임 등도 나서서 “대체 불가능하고 훼손에 취약한 세계유산을 이용하는 행위를 즉각 중지해달라”고 호소했다.

일련의 사건 이후 일부 뮤지엄은 전시장에 백이나 자켓을 착용하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거나 입구에서 가방 검사를 하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 뮤지엄들은 방문객에게 그런 제약을 가하기보다 유명한 그림 주변에 경비를 늘리는 방법으로 대응하고 있다.

환경운동가들의 우려와 주장은 충분히 납득할만한 것이다. 기후위기로 해마다 수천명이 목숨을 잃고 있고, 2050년까지 12억 인구가 기후난민이 될 것이라는 주장도 틀린 말이 아니다. 2050년이면 불과 30년도 남지 않은 시점, 젊은이들에게는 바로 당면한 위기이고 발등의 불이다. 그럼에도 각국 정부는 필요한 대응을 미루고 있으니 그 위선에 대한 항의가 명화테러라는 충격요법으로 표출된 듯하다. 뮤지엄 공격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비슷한 충격이 계속되면 효과는 떨어지는 법, 언제까지 죄없는 예술품을 공격할 것인가.

<정숙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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