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벤 버냉키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 지난달 수상기념 기자회견 중 이런 말을 했다. 젊은 경제학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조언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그는 “살면서 배운 교훈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것, 그러니 과도하게 계획을 세우지 말라”고 했다. 경제를 훤하게 꿰뚫고 있을 세계최고 경제통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알 수 없다’라니, 좀 의외여서 기억에 남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경제도, 사회도, 우리 개개인의 삶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 수 없다’가 정답이다. 정치도 그러하다는 것을 이번 중간선거가 보여주었다. 수많은 후보들이 이 말에 공감하겠지만 특히 실감하고 있을 인물이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다.
선거일인 지난 8일 트럼프는 플로리다의 마라라고 리조트에서 대대적 축하파티를 준비했다. 골수 지지자들과 기자 등 200 여명을 초대해 선거결과를 같이 지켜보며 자신을 향한 지지열기가 최고조에 달할 때 2024 대선 출마 발표를 하려던 계획으로 짐작되었다. 하지만 빨간 색으로 상징되는 공화당의 압도적 승리, ‘붉은 파도’는 없었다. 자신이 지지한 후보들이 줄줄이 승리함으로써 존재감을 한껏 과시할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는 선거결과가 ‘흥미롭다’는 말로 그 밤의 파티를 마무리했다.
이번 중간선거는 몇 가지 점에서 대단히 흥미롭다. 첫째는 ‘공화당의 대승’으로 점쳐졌던 ‘붉은 파도’ 예보가 오보로 드러났다는 사실이다. 집권당이 중간선거에서 참패하는 것은 미국의 전통 아닌 전통이다. 야당이 압승하는 배경은 물가, 범죄, 불법이민 등 온갖 문제들을 행정부 무능 탓으로 몰아붙이는 맹공격. 야당지지 유권자들의 투표율을 높인다. 반면 집권당 지지 유권자들은 대통령 국정수행 중간평가 성격인 중간선거에 별로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 아울러 중간선거에서 부동층은 집권당에 반하는 투표를 하는 경향이 있다. 나라가 너무 한쪽으로 기우는 것을 막고 싶은 심리이다.
이번 선거에서 공화당은 연방하원을 장악하고, 잘 하면 연방상원에서도 다수당이 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파도’와는 거리가 멀다. 선거결과에 노심초사했던 조 바이든 대통령은 그날 밤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그 일등공신으로 지목되는 것이 연방대법원과 트럼프이다. 보수성향 연방대법이 여성의 낙태권을 보장한 로우 대 웨이트 판결을 뒤집은 것이 여성을 비롯한 민주당, 온건 공화당 그리고 부동층 유권자들을 대거 투표소로 몰려가게 했다. 지금의 대법을 구성한 것이 트럼프이니 결국은 이 모두가 트럼프의 작품, 새옹지마이다.
이번 선거에서 트럼프가 미친 영향 역시 흥미롭다. 2020 대선 결과를 부인하는 등 트럼프 식 극단주의에 유권자들이 식상하기 시작했다. 트럼프가 내세운 후보들의 성적표가 좋지 않다. 가장 대표적인 패배가 펜실베니아 연방상원 선거. 팻 투미 상원의원이 재출마를 포기하면서 공석이 된 자리이다. 투미 의원은 지난해 트럼프 탄핵안에 찬성표를 던진 7명의 공화당 상원의원 중 한명이다. 이 선거에 트럼프는 ‘닥터 오즈’로 잘 알려진 TV 유명인사 메멧 오즈를 후보로 내세우고 엄청 공을 들였다. 결과는 민주당의 존 페터만 부지사 승리. 펜실베니아에서는 1962년 이후 최초의 민주당 상원의원이다. 덕분에 민주당은 상원의석 하나를 추가했다.
트럼프에 반기를 들었던 공화당 정치인들이 선전한 것도 흥미로운 현상이다. 조지아 상원 선거에서 트럼프가 지지한 풋볼스타 허셀 워커가 라파엘 워녹 현 의원과 결선투표까지 가는 데 반해 2020 선거결과를 뒤집으라는 트럼프 말을 정면 거부했던 브라이언 켐프 주지사는 가볍게 재선에 성공했다. 뉴햄프셔에서도 트럼프 사람인 돈 볼덕 후보가 연방상원 선거에서 매기 하산 현 의원에게 형편없이 패한 반면 트럼프를 대놓고 비난했던 크리스 수누누 주지사는 무난히 재선에 성공했다.
공화당 내에서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은 자연스럽다. 주류와 너무 동떨어진 주장을 하는 트럼프 사람들이 너무 많이 후보로 나온 게 문제였다는 지적이다. 반면 이번 선거에서 근 20포인트 차이로 대승을 거둔 플로리다의 론 디샌티스 주지사에게 시선이 쏠리고 있다. 2024 대선에서 트럼프 보다 나은 카드가 될 것이라는 기대, 트럼프는 이제 한물갔다는 말이 공화당 내에서 슬금슬금 나오고 있다.
트럼프의 사람들 중 오하이오 연방상원 선거에 출마한 J.D. 밴스 후보는 승리했다. 그런데 정작 이 선거에서 주목받은 사람은 민주당 후보 팀 라이언 연방하원의원이다. 그는 선거 결과가 나오자 바로 밴스 후보에게 전화를 하고 지지자들에게 말했다. “나는 밴스에게 패배를 인정하는 특권을 누렸다. 선거에서 지면 이를 인정하고 국민의 뜻을 존중하는 것이 이 나라의 작동 방식이다. 자신이 이기면 합법, 지면 누군가가 훔친 것이 되는 시스템으로 미국이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
미국에는 패배를 품위 있게 인정하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다. 1896년 이후 대선에서 패배한 모든 후보들이 그렇게 했다. 트럼프만 예외였다. 라이언과 몇몇 패자들은 잊혀져가던 전통의 불씨를 되살렸다. 극단주의는 퇴조하고 패배를 인정하는 아름다운 전통은 되살아나는 분위기이다. 불안했던 미국의 민주주의에 좋은 징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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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