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초기였던 80년대 가족처럼 가까이 지내던 백인 노부부가 있었다. 어느 날 그 댁에 가니 손님이 와있었다. “영국에서 방문한 친구 부부”라고 집주인이 소개를 했다. 세 커플이 둘러 앉아 담소하던 중 영국 이야기가 나왔다. 그때 영국인 부부가 인상을 찌푸리며 한 말이 지금도 생각난다. 인도계 이민자들이 눈에 거슬린다는 내용이었다. 인도 여성들의 전통의상인 사리 차림에 대해서도 못마땅해 했다. “바닥까지 질질 끌리는 옷을 입고 다니니 얼마나 지저분한가, 거리의 먼지를 다 쓸고 다닌다”고 흉을 보았다.
백인인 그들의 유색인종 비하 발언 앞에서 순간 난감했다. 잠시 어정쩡한 표정으로 앉아있었고, 그러는 사이 화제는 다른 이슈로 넘어갔다. “너희는 유색인종이라도 인도인이 아니니 다르다” 정도로 영국인 부부는 생각했던 걸까.
인도계 이민 2세인 리시 수낵(42)이 25일 영국의 신임총리로 취임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래 전 기억을 떠올렸다. 백인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데 너무도 당당하던 그들, 영국백인들의 사고방식은 이제 바뀐 걸까. 백인의 시각으로만 세상을 보기에 세상은 너무 많이 바뀌었다.
수낵의 총리취임은 영국 역사상 최초의 유색인종 총리이자 영국 현대사상 최연소 총리(영국 역사상 최연소기록은 1783년 24살의 윌리엄 피트 총리)라는 기록을 세웠다. 영국에서 젊은 총리가 낯선 것은 아니다.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보수당의 데이빗 캐머론이 모두 43살에 총리가 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소속당의 지도자로서 오랜 정치경험이 있었던 반면 수낵은 투자전문가로 일하다가 불과 7년 전 하원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했다. 2020년 2월 재무장관이 되어 팬데믹 와중의 불안한 경제를 무난히 이끌어 주목을 받았고, 2달 사이 총리가 세 번 바뀌는 혼란 속에 총리소임의 기회를 얻었다.
“인도의 아들이 제국을 발아래 두다” “인도에 총독을 보내고 또 보내던 (영국)의회가 인도계를 총리로 맞다” … 인도 매스컴은 흥분해서 보도했다. 왜 안 그러겠는가. 올해는 인도가 영국의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지 75주년이 되는 해이다. 영국은 1858년부터 1947년까지 89년간 인도를 지배했다. 한편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인도에 들어가 사실상 통치를 하며 경제적 수탈을 일삼은 것은 1757년부터였다. ‘영국지배 200년’이라는 말이 나오는 배경이다.
그렇게 한이 깊은 인도인들에게 수낵의 영국총리 취임은 단순한 경사가 아니다. 제국주의 시대에 대대로 겪었던 착취, 탄압, 굴욕을 씻어주는 한줄기 소나기 같은 효과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상황에 접목해보면 재일동포가 자민당 총재로서 일본총리가 되는 사건, 혹은 미주한인이 백악관을 차지하는 쾌거 같은 일인데, 둘 다 아직은 요원하다. 영국의 인도계는 물론 인도 국민들의 기쁨과 감격이 예사롭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이민 2세로서 수낵은 미주한인 2세들이 동질감을 느낄만한 경험들을 공유하고 있다. 첫째는 부모의 뜨거운 교육열. 의사인 아버지와 약사인 어머니는 아들을 영국사회 최고의 엘리트로 키우느라 애를 썼다. 학비 비싼 사립명문 기숙 고등학교에 아들을 보냈고, 이후 아들은 옥스포드와 스탠포드에 진학하면서 1세 부모의 꿈을 이뤄주었다.
둘째는 이중의 정체성과 뿌리교육. 영국에서 태어났지만 인도의 뿌리를 가진 그는 두 가지 전통 속에 자랐다. 주말이면 힌두교사원에 가고 지역 축구클럽에 가입해 축구를 하면서 성장했다. 주말마다 한국학교와 한인교회에 가는 한편 축구 야구 등 스포츠 활동으로 몹시 바쁜 우리 아이들과 비슷하다. 셋째는 인종차별의 아픔. 자라면서 차별을 받은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뇌리에 새겨진 아픈 기억이 있다고 그는 말했다. 10대 때 두 동생과 함께 패스트푸드 식당에 갔을 때였다. 다른 손님들이 자신들에 대해 인종차별적 막말을 하는 걸 듣고 “몹시 아팠고 그 말이 지금껏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다”고 했다.
제국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20세기 초반 세계는 대략 둘로 나뉘었다. 열강과 식민지, 즉 지배국과 피지배국이다.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유럽의 식민지 쟁탈전의 희생양이었다. 강압적 병합, 고유 정치체계 파괴, 자원과 노동력 탈취 등 식민제국이 저지른 죄과는 심대하다. 20세기 중반을 기해 식민주의는 막을 내렸지만 지금까지 살아남은 그 시대의 유령이 있다. 백인이 우월하다는 인식이다.
유럽 제국은 자신들의 우위를 주장하기 위한 사회적, 과학적 이론들을 만들어냈다. 타민족에 대한 지배와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우생학이 대표적이다. 우월한 백인이 유색인종들을 이끌어줘야 열등한 그들이 발전할 수 있다며 이 모두가 백인이 책임져야 할 ‘백인의 짐’이라는 말까지 했다. 그런 왜곡된 이론들이 오랜 세월 퍼져나가면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모두 세뇌되었다. 왠지 백인이 우월한 것 같고 유색인종은 덜 미더운 느낌이다. 오바마에 대한 미국 백인들의 반발이 좋은 예이다.
런던 다우닝 가 10번지 총리관저, 대대로 백인이 주인이던 그곳에 인도계가 들어섰다. 백인이 주도해온 각국의 각계 정상에 유색인종이 속속 진출해야 인종주의는 엷어진다. 치솟는 인플레와 경기침체 우려, 보수당 내 분열 등 난제를 수낵 총리가 잘 해결해나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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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