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에는 두 개의 지진대가 있다. 첫째는 캘리포니아를 남북으로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샌 안드레아스 지진대이다. LA에서 동쪽으로 몇 십 마일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빅원이 닥치면 재앙을 피할 길이 없다. 1994년 노스리지 대지진의 악몽은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트라우마이다.
두 번째는 인종충돌의 지진대이다. 미국의 대표적 다인종 다문화 도시인 LA는 다양한 만큼 갈등과 충돌의 소지도 많다. 인종갈등은 미국의 숙명이다. 노예제도를 토대로 세워진 나라로서 국가적 원죄이자, 다양한 인종이 밀려드는 이민의 나라로서 넘고 또 넘어야 할 장벽이다. 1965년 와츠 폭동이 흑백 간 충돌이었다면, 1992년의 4.29 폭동은 흑과 백의 갈등 사이에 한인이 끼어 넣어진 억울한 사건. 미주 한인이민 사상 최대의 아픔으로 남아있다.
지진이 일어나는 것은 지구가 한 덩어리의 땅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대한 땅덩어리가 아니라 여러 조각의 지각 판들이 지구를 감싸고 있다. 그런데 이 판들이 가만있지 않고 조금씩 움직이면서 서로 밀리기도 하고 뒤틀리기도 하며 때로 확 튕겨지면서 진동이 발생한다. 바로 지진이다.
LA는 다양한 인종과 민족 커뮤니티들이 제각각의 지각 판을 이루며 구성된 도시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의 도시이지만 사실 아슬아슬하다. 정치적 경제적 이해에 따라 지각 판들은 서로 합치기도 하고, 밀쳐내기도 하며 물밑에서 끊임없이 견제한다. 물밑에 있었어야 할 인종적 견제와 적대감이 느닷없이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지금 LA가 대지진을 겪고 있다. 인종갈등이 불씨가 된 정치적 대지진이다.
어떤 이유로 누가 폭로했는지는 모르지만 1년 전 녹음파일이 며칠 전 레딧에 올려지고, 9일 LA타임스가 보도하면서 파장이 폭발적으로 커졌다. 정치인들의 인종차별적 조롱과 욕설에 격분한 주민들은 LA시의회로 몰려가고, 시의원 주의원 등 가주 정치인들은 물론 바이든 대통령까지 관련 시의원들의 사임을 촉구하고 나섰다. 사건의 핵심 인물인 누리 마티네스 LA 시의장은 언론보도 바로 다음날인 10일 시의장직에서 물러났고, 그러고도 분노한 여론이 가라앉지 않자 12일 시의원직마저 내려놓았다. LA 역사상 최초의 라틴계 여성 시의장으로서 LA 시장직 진출이 예견되었던 라틴계 커뮤니티의 대표적 정치인은 이로써 허망하게 추락하고 말았다. 함부로 놀린 세치 혀가 오랜 세월 공들인 정치인생의 탑을 한순간에 무너트렸다.
문제의 근원은 인종차별적 거친 발언이 아니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골수 깊이 박힌 인종차별 의식이 문제이다. 지난해 10월 마티네스는 같은 라틴계인 케빈 데 리온과 길 세디요 시의원들 그리고 LA카운티 노동연맹의 론 헤레라 회장과 함께 선거구 재조정 관련 회의를 하고 있었다. 10년에 한번씩 조정되는 선거구를 어떻게 자르고 분할해야 라틴계에 유리할지에 이들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그러다보니 터져 나온 게 라틴계 정치력 확장에 걸림돌이 되는 대상들에 대한 분노. 흑인 정치인들과 흑인에 친화적 정치인들이 주 공격대상이 되었고, 코리아타운에 많이 사는 멕시코 원주민인 오아하카인들 그리고 유태인 아르메니안 등도 닥치는 대로 찧고 까불어졌다.
그중 대표적으로 조롱받은 인물은 마이크 보닌 시의원. 백인 동성애자로 남편과 함께 사는 보닌을 마티네스는 ‘못된 년’이라고 부르고, 그가 입양한 흑인소년을 ‘원숭이 같다’고 비하했다. 보닌이 “라티노에 대해서는 입도 뻥끗 안하면서” 흑인계와 가까워 미운 털이 박힌 것이었다. 방심해서 내뱉은 말들은 부메랑이 되어 결국 그 자신들에게 비수로 꽂혔다.
언제 터질지 모를 ‘인종’ 지진대에서 사는 길은 의식을 바꾸는 것이다. 라티노 정치인들이 저지른 잘못은 단순한 말실수가 아니다. 지도자로서의 품격을 갖추지 못한 자질 미달, 시의원으로서 주민들의 화합에 앞장서야할 기본적 책무 망각, 주민들이 지도자에 대해 갖는 기대에 대한 배신 등 죄목은 많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와 남을 가르는 차별의식이다. 인종과 피부색을 근거로 타자를 배척하고 자신들만 올라서려는 편협한 생각이다.
이번 인종차별 스캔들은 한인사회에 좋은 교훈이 된다. 차세대 정치인 양성과 정치력 신장을 커뮤니티의 최대과제로 삼는 한인사회로서는 배울 점이 많다. 그들 라티노 정치인이 안타까워한 정치적 불공정, 화난 김에 마구 표출한 인종차별 언행은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들은 라틴계 주민이 LA 인구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데도 LA 시의원 15명 중 라틴계는 3분의 1이 못 되는 현실에 분개했다. 목소리를 내줄 대표 부족으로 라틴계가 공정한 대우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한인사회도 같은 안타까움을 갖고 있다. 한편 소수계로서 당하는 인종차별 피해를 억울해하면서, 자신들보다 힘없는 소수계를 보면 그 자신이 가해자가 되는 차별의 악순환을 그들은 보여주었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인종이나 피부색으로 내편 네편을 가르면서 이 땅에 사는 데는 한계가 있다. 정치인들은 피부색이 아니라 정책으로 지지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한인사회가 이번 사건을 타산지석으로 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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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