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푸틴과 ‘메데아’

2022-10-05 (수) 정숙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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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고 아름다운 마녀 메데아(Medea)는 그리스 신화와 비극을 통틀어 가장 잔혹한 인물이다. 그녀는 자기나라에 황금양털을 얻으러온 이아손과 사랑에 빠져 그를 도우려고 적들은 물론 자신의 친오빠를 죽이고 이복동생은 토막살해한 후 도주한다. 이아손의 나라에 도착해서는 황금양털을 가져오면 왕위를 넘겨주겠다던 이아손의 아버지가 약속을 지키지 않자 그의 딸들을 시켜 토막내 삶아 죽인다. 그리고 훗날 이아손이 자기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려하자 그 여자와 아버지를 죽이고 이아손과의 사이에 낳은 자신의 아이들까지 모두 살해하여 복수한다.

에우리피데스는 기원전 431년에 쓴 희곡 ‘메데이아’에서 피비린내 진동하는 인간의 폭력성을 극적으로 묘사했으며, 이후 메데아는 2,500년 동안 문학, 미술, 음악, 영화 등 수많은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메데아를 노래한 오페라는 3편이 있다. 17세기 프랑스 음악가 샤르팡티에의 ‘메데’(1693), 19세기 이탈리아 음악가 루이지 케루비니의 ‘메데아’(1797), 현대작곡가 파스칼 뒤사팽의 ‘메데이아’(1992)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케루비니의 ‘메데아’가 지금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2022-23 시즌 개막작으로 10월말까지 공연되고 있다.


케루비니의 ‘메데아’는 140년 역사의 메트가 이번에 처음 무대에 올렸을 정도로 거의 공연되지 않는 작품이다. 이유는 또 역시나 마리아 칼라스 때문인데, 메데아를 너무도 완벽하게 노래한 음반들과 영화, 그 스타파워가 이 작품에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서 그 누구도 감히 공연을 꿈꾸지 못했던 것이다.

여기에 도전장을 내민 소프라노가 손드라 라드바노프스키(53), 메트 오페라의 스타이며 LA 오페라에서도 ‘일트로바토레’와 ‘토스카’ 등 여러 무대에 출연한 이 시대의 걸출한 소프라노다. “이 오페라는 마리아 칼라스와 동의어”라고 무거운 부담감을 시인한 그녀는 하지만 수많은 오페라의 여주인공역을 노래하고 난 지금 자신에게 남은 것은 메데아밖에 없다고 도전의 이유를 밝혔다. “뱀처럼 교활하고, 헐크 같은 괴력을 지녔으며, 여신처럼 우아한 메데아를 노래하는 것은 쉬지 않고 달리는 마라톤이며 에베레스트 등정과 같다”고 묘사한 라드바노프스키는 그리고 마침내 이 공연으로 지금 커리어 최대의 찬사를 받고 있다. 데이빗 맥비카의 타오르듯 화려한 프로덕션이 매혹적인 메트의 ‘메데아’는 이번 시즌 오페라계의 최대 화제작이다.

그런 한편 지난주 뉴욕타임스의 한 칼럼니스트가 이 메데아를 블라디미르 푸틴과 비교한 글을 게재해 흥미를 끌고 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무고한 사람들을 야만적으로 죽인 메데아처럼, 푸틴도 구소련 제국을 되찾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수만명의 무고한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또 자신이 무시당하면 친인척을 가리지 않고 학살극을 벌인 메데아처럼, 똘똘 뭉친 서방과 우크라이나의 강한 반격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푸틴이 핵무기 카드를 흔들며 무서운 학살극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억지로 꿰어 맞춘 느낌은 있지만 터무니없는 비유도 아니다.

지난 30일 푸틴은 우크라이나 내 4개 점령지역의 합병을 선언하고 “우리에게 가능한 모든 무기를 동원해 영토를 지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연설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미국은 일본에 두 차례 핵무기를 사용하는 선례를 남겼다”고 말한 대목이다. 미국이 먼저 두발을 쐈으니 러시아도 그 이상 핵폭탄을 쓸 수 있다는 선전포고인 셈이다.

여러 언론의 분석에 의하면 푸틴이 실제로 핵무기를 터트릴지 아닐지, 나토와 미국은 가늠하지 못하는 상태다. 하지만 77년만에 처음으로 핵무기가 쓰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굉장히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한다. 푸틴이 연설에서 “이것은 허풍이 아니다”(This is not a bluff)라고 못 박았기 때문이다.


지금 푸틴은 상처 입은 짐승과도 같다. 외부에서 입은 상처뿐 아니라 자국 내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징집을 피해 탈출하고 있으니 보통 망신이 아니다. CBS 뉴스는 징집령 이후 지난 2주 동안 카작스탄, 세르비아, 아르메니아, 튀르키예, 그루지아, 핀란드 등 이웃나라로 넘어간 러시아인은 30만명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이들만이 아니다.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된 후 지난 7개월 동안 전쟁에 반대하고 정치적 탄압이나 경제적 불안 등을 이유로 러시아를 떠난 지식인, 언론인, 예술가, 난민들이 무려 80만이라는 보도가 나온 적도 있다.

독재자는 궁지에 몰릴수록 더 위험해지고 더 악랄해진다. 서방 전체와의 싸움이라고 해도 좋을 이 전쟁에서 ‘상남자’ 푸틴이 입은 모욕감은 ‘벼랑 끝 전술’로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오페라 마지막 장면에서 악에 받친 메데아는 두 아들을 죽인 후 사원에 불을 지른다. 화염이 그녀를 둘러싸고 타오르자 공포에 빠진 군중은 도망가며 노래한다.

“오, 두려워라! 땅과 하늘이 화염에 휩싸였네! 불타는 하늘로부터 날아가 도망가자.”

만일 푸틴이 핵폭탄을 터트린다면 땅과 하늘이 화염에 휩싸이고, 수백만 명이 도망가지도 못한 채 즉사할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이 아니라 현대의 비극이요, 인류 역사상 가장 무서운 참극이 될 것이다.

한편 오페라 ‘메데아’는 메트의 라이브 HD 프로그램에 따라 오는 22일 각 지역 영화관에서 볼 수 있다. 오페라 좋아하는 사람은 놓쳐서는 안 되겠다.

<정숙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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