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다시 만난 ‘이쾌대’

2022-09-28 (수) 정숙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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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여름 서울에 갔을 때, 잠시 짬을 내서 덕수궁의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은 적이 있다. 무슨 전시가 있는지도 모르고 들렀는데 뜻밖에 너무 좋은 전시를 만나 어쩔 줄 몰라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쾌대’라는, 대단히 특이하고 생소한 이름을 가진 화가의 작품전이었다. 1930년에서 1950년 사이에 활발하게 활동했던 화가였으나 월북하면서 잊혀졌다고 했다. 1988년 해금된 후 가족의 노력으로 다시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고, 광복 70주년이던 2015년에야 그를 재조명하는 특별전이 열린 것이었다.

사연이야 어찌됐든 작품 하나하나가 너무도 강렬하고 인상적이어서 보는 내내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과감한 구도와 붓질, 밝고 명랑한 색채, 감정이 살아있는 인물들, 역동적인 묘사…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와 해방기에 어떻게 이런 작품들이 나올 수 있었는지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전시장을 나오면서 그의 화집이나 전시 카탈로그를 사려고 돌아보았지만 그제까지 도록 한 권 나온 것이 없었는지 아쉽게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이쾌대의 작품을 이곳 미국에서 만나게 될 줄은 꿈도 꾸지 못했다. 지난 8일 LA카운티 미술관(LACMA)에서 열린 ‘사이의 공간: 한국미술의 근대’(The Space Between: The Modern in Korean Art) 프리뷰에서였다. 130여점이 걸린 드넓은 전시장을 돌다가 이쾌대의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을 만났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오랫동안 짝사랑하던 사람을 갑자기 코앞에서 마주친 기분이었다.

그 자화상은 7년 전 덕수궁 전시에서도 가장 인상 깊게 보았던 작품이다. 청색 두루마기를 입고 중절모를 쓴, 크고 부리부리한 눈과 짙은 눈썹을 가진 쾌남이 정면에서 나를 응시한다. 눈빛이 너무 강렬해서 도무지 눈을 돌릴 수가 없는, 무섭도록 힘찬 그림이다.

그 옆에는 벽면 전체를 차지하는 대작 ‘군상’이 걸려있다. 수십 명이 엉켜있는 이 그림은 인물화에 뛰어났던 이쾌대의 기량과 조형감각이 역동적으로 표출된 작품으로, 해방이후 좌우가 대립하며 사회전체가 혼란에 빠졌던 시기에 약소민족의 운명을 아비규환의 지옥처럼 묘사한 민족미술의 걸작이다.

개인적으론 이 두 작품을 다시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뻤지만, 라크마의 한국근대미술전은 그 외에도 너무나 중요한 작품들이 즐비한, 절대 놓쳐서는 안 될 특별전이다. 우리나라에 처음 서양미술이 들어온 구한말로부터 현대미술기로 진입하기 전까지, 1897년부터 1971년 사이에 제작된 88명 작가의 그림과 사진, 조각품을 한자리에서 볼수있다. 이 시기는 대한제국 말기에서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남북분단을 포함하는 그 어느 때보다 혼란했던 한국의 격동사와 겹치는 시기로, 말하자면 오늘날 세계 화단이 주목하는 한국 현대미술의 그 시작과 역경의 성장사를 조명하는 것이다.

라크마는 미국에서 한국 근대미술전이 열리는 것은 처음이며 거의 모든 작품이 해외에서 처음 선보이는 것이라고 강조하는데, 약 70년간의 근대미술을 이처럼 시기와 주제별로 나누어 총체적으로 살펴본 전시가 한국 내에서도 열린 적이 있는지 궁금하다. 물론 예술품으로서의 수준보다는 그 역사성이 중요하다는 점은 염두에 두어야겠다.

버지니아 문 큐레이터가 공들여 기획한 이 전시는 한국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여해온 62점과 ‘이건희컬렉션’ 21점을 위시해 보스턴미술관, 한미사진미술관, 리움미술관, USC 퍼시픽아시아 뮤지엄 등 한국 미국 일본의 여러 기관과 개인이 소장한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대부분 책에서 보았거나 말로만 들어온 작품들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의 자화상(1915), 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의 자화상(1928), 또 다른 월북작가 배운성의 ‘가족도’(1930∼35)는 특별한 아우라를 가졌다. 특히 ‘가족도’는 한복을 입은 17명의 대가족이 경직된 표정으로 일제히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데 그 독특한 구도와 사실적 묘사는 같은 시기에 미국에서 그려진 ‘아메리칸 고딕’(그랜트 우드, 1930)을 연상케 한다.

채용신이 비단에 그린 ‘고종황제어진’(1920)을 시작으로 세계무대에서 활약했던 무용가 최승희의 사진(1930)을 볼 수 있고, 이중섭의 ‘흰 소’와 은박지 그림들’(1950년대), 박수근의 ‘창신동 기와집’(1956)과 ‘유동’(1963), 김환기 초기작 ‘론도’(1938)와 ‘피난열차’(1951) 등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들의 대표작이 전시됐다. 운보 김기창의 ‘정청’(1934)과 함께 그의 그늘에 가렸던 아내 박래현의 ‘여인’(1942)이 나란히 걸렸고, 재불화가 이성자의 ‘천년의 고가’(1961)는 우아하고 찬란하다.

아울러 지난해 105세로 타계한 김병기 화백의 ‘가로수’(1956)와 함께 박서보, 이응노, 윤명로, 존 배 등 근대에서 현대를 잇는 작가들의 초기작품들도 걸렸고, 사진예술의 선각자들인 한영수, 성두경, 남상준, 임응식, 임석재, 이형록의 흑백사진들도 전시돼있다. 유명한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 프랑스 화가 폴 자쿨레, 영국 판화가 엘리자베스 키스 등 일제강점기에 한국을 방문했던 외국인들이 남긴 사진과 그림들도 흥미를 끈다.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는 이제 100여년 남짓하다. 그 초기에 우리나라가 지나온 고난과 격동의 시간들을 예술로 남긴 작품들, 자녀 손주와 찬찬히 돌아보며 역사공부 하기에도 참 좋은 전시다. 내년 2월19일까지.

<정숙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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