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꿈꾸는 미래 세상’ 누구든 한 번쯤 생각해 봄직한 주제다. 해가 거듭 할 수록 꿈꾸는 일의 빈도가 낮아진다. 꿈을 꿈으로 놔 두기보다 실현 가능성의 척도를 재는 영특함, 꿈꾸는 세상보다 꿈의 현실화에 구체적 실천을 도모하는 이들의 세상이기에.
현대문명의 발전, 물질적 풍요, 욕망의 성취, 상상도 못 할만큼 앞서가는 디지탈 시대가 펼쳐졌다. 그렇다고 ‘더이상 꿈 꿀 세상이 없다’라고 단정해서는 안되리라, 늘 미지의 곳을 향해 마음 열려있는 인간이기에.
코비드19 팬데믹으로 Zoom영상의 세계가 급속도록 확장됐다. 각종 토론이며 강의 외에 오케스트라 연주, 콘서트, 회사 간부 모임, 중요한 인터뷰 심지어 가족 모임과 요가, 명상 등 이젠 거의 일상화가 됐다. 세상이 마비 되지 않을까 했던 염려도 잠깐, 자연스럽게 다른 통로가 열렸고 익숙해졌다.
불과 3-4 년 사이에, 장소와 시간 국적을 초월해 언제 어디서나 연결번호와 비밀코드만 있으면 가능한 만남의 공간이 됐다. 전화기의 여러 기능으로 문자 메세지와 뉴스 등을 주고받으며 넘쳐나는 정보에 몸살을 앓을 정도다.
이즈음에 또다른 정신문화의 현실적 공간이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마음과 정신 더불어 육신의 휴식을 요하는 수행공간이다. 그 규모도 다양하다. 몇십 명이 모이는 작은 공간에서부터 몇 백명을 수용 할 수 있는 한 촌락을 이루는 자연환경 속에 자리잡은 대규모 명상센터까지. 그 수행장소 등록을 위해 몇 개월씩 기다려야 하는 사례가 많다. 인간의 꿈꾸는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며 마음의 평화에 이르는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염원하는 평화와 안녕의 길이 명상의 무궁한 침묵 속에 있음을 간파한 것일까? 명상의 매력은 무한한 마음의 깊이를 스스로 느끼는데 있다. 누구의 간섭이나 편견 오해 애증 등 복잡하게 얽힌 관계로부터의 자유함을 구가 하는데 이보다 나은 것은 없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 살피는 명상을 하는데 특별한 장소나 환경이 꼭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명상의 끝은 없다. 일상이 명상이 되어야 한다. 명상의 맑고 고요한 곳에 비친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봤다. 행사를 치른 기사 사진에 내 모습이 억지로 잘려진 듯한 것을 보고 ‘그 사진 누가 제공한거냐’고 관계자에게 톡으로 묻는 자신을 보며 웃음이 나왔다.
아차 사이에 스스로 아상(我相)의 그림자를 보았다. ‘내가 제공하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찍은 거라 모르겠다’는 답을 들으며 부끄러웠다.
무엇이 중요한가 <뭣이 중헌디> 라는 말이 생각나면서 속으로 한참을 웃었다. 명상을 하고 자신을 내려놓고 무아와 무상의 의미를 음미한다고 자부했던 자신. 그것은 한갓 명상의 시간에만 가능했을 뿐. 명상의 열매인 마음에 분별의식을 벗어나 완벽한 평정이되 기까지는 한참 가야겠구나 반성했다.
내 어리석은 아상(我相)이 이렇게 벌겋게 살아있음을 알아차렸다. 다행이다. 자신의 미숙함을 보면서 자꾸 깨져야 한다. 명상을 통해 스스로를 바라보는 공부 하기 바란다. 어떤 상황에서도 요동치지 않는 천년의 침묵이 주는 진정한 평정과 마음의 평화.그곳에 진정한 행복이 자리하리니.
“우리가 처한 어려움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변화는 내면의 작은 용기에서 시작되며 공부를 할 수록 그 용기는 더욱 강해질 것 이다.” 라는 조 국 교수의 글을 명상의 한 부분으로 적용해도 될 것 같다.
강한 용기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공부. 전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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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원/뉴욕불교방송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