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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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진정한 영웅

2022-09-20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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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로널드 레이건 보다 식자층으로부터 욕을 많이 먹은 대통령도 드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레이건은 명문가 출신도 아니고 대학도 별 볼 일 없는 데를 다녔을뿐 아니라 평생 직업이 배우였는데 그 분야에서도 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취임 전부터 재임 기간 내내 ‘바보’ ‘멍청이’ ‘위험한 인물’이란 수식어가 그의 이름 앞에 따라다녔다.

그러나 이제 그가 20세기 후반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었다는데 많은 학자들은 동의한다. 70년대 내내 미국을 괴롭혔던 인플레와 고실업을 해결하고 탄탄한 경제 성장을 이뤄냈고 강력한 군비 증강을 통해 한 때 전세계를 뒤덮을 것 같던 공산주의로부터 미국을 지켜냈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의 비난과 조롱에도 미국민들은 레이건을 사랑했다. 그의 퇴임 당시 지지율은 68%를 기록했는데 그때까지 이같은 기록을 갖고 있던 것은 프랭클린 루즈벨트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집권 8년 동안 인플레는 12.5%에서 4.4%로 낮아졌고 연 3.6%의 경제 성장율을 이뤄냈으며 1,600만개의 일자리가 창출됐고 빈곤율은 14%에서 12.8%로 내려갔다. 존 힝클리의 총에 맞아 죽을 고비에 놓였는데도 “여보, 피하는 걸 깜빡했어”라고 하는가 하면 “의사가 공화당원이었으면 좋겠는데”라는 그의 유머 감각은 국민들을 감동시켰다.


공부를 잘해야만 꼭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고 명문대를 나와야 정치적으로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사람은 오히려 자기만 잘난 줄 알고 포용력도, 지도력도 보여주지 못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에서 서울 법대를 나온 이회창이 상고 출신인 김대중, 노무현에 진 것이나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꼽히는 워싱턴과 링컨이 대학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것은 우연이 아닐 수 있다. 프린스턴대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MIT 박사 학위를 가진 조지 슐츠는 레이건 밑에서 7년간 국무장관을 지낸 후 “그는 어쩌면 우리보다 더 똑똑한 지도 모른다”는 말을 남겼다.

지금 지구 반대편에서 또 한 명의 배우 출신 위대한 정치인이 탄생하려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볼로도미르 젤렌스키가 그 사람이다.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원래 키이우 국립 경제대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그러던 그가 ‘크바르탈 95’란 TV극 제작회사를 차리고 코미디언으로 변신한 후 ‘인민의 하인’이란 시리즈에서 대통령으로 출연, 엄청난 인기를 얻자 인생 진로가 바뀌기 시작한다. 극에서 우크라이나의 부정부패를 꼬집던 그는 아예 ‘인민의 하인’이란 정당을 만들고 2019년 대통령에 출마해 73%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된 것이다.

그러나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소식이 전해지자 대부분은 젤렌스키의 정치 생명은 물론 자연 생명도 끝났다고 생각했다. 러시아의 경제 규모나 군사력 모두 우크라이나와는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젤렌스키는 속히 망명하라는 서방의 권고를 “지금 우리가 필요한 것은 라이드가 아니라 무기”라며 한마디로 거절하고 결사항전 의지를 밝혔다. 의외의 강력한 저항에 놀란 러시아는 한 달 여만에 수도 키이우 점령을 포기하고 퇴각한 후 동부와 남부 침공으로 전략을 바꿨다.

그 후 6개월 가까이 교착 상태에 빠져 있던 동부 전선에 이 달 초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우크라이나 제2의 도시 하르키우를 우크라이나 군이 기습해 탈환한 것이다. 이곳은 한 때 탱크 생산 세계 1위를 기록했을 정도로 군수품 생산의 중심일뿐 아니라 항공, 전자, 핵 발전 시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처럼 전세가 악화하자 러시아 편에 서 있던 인도와 중국마저 거리를 두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드에서 푸틴과 만난 인도의 모디 총리는 “지금은 전쟁의 시대가 아니다”며 공개적으로 전쟁 종식을 요구했고 중국의 시진핑도 전쟁에 관한 ‘의문과 우려’를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사태로 푸틴이 궁지에 몰린 것은 사실이지만 쉽게 전쟁이 끝나기보다는 대대적인 반격에 나설 가능성이 더 크다. 이대로 꼬리를 내리고 철수한다면 패전의 책임을 묻는 소리가 나올 것이고 실각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니콜라이 2세부터 트로츠키에 이르기까지 쫓겨난 권력자의 말로가 어떻다는 것을 잘 아는 푸틴이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란 얘기다.

이번 전쟁은 단순히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간의 영토 분쟁이 아니라 자유 민주주의를 원하는 시민들과 푸틴으로 상징되는 호전적 파시즘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푸틴이 이 싸움에서 이길 경우 발트해 3국과 동유럽 안보가 위협받는 것은 물론 대만과 한반도 등 그 여파는 어디까지 미칠 지 모른다. 앞으로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모르지만 푸틴의 침략군과 맞서 나라를 지키는데 목숨을 건 젤렌스키는 ‘우리 시대의 영웅’으로 평가받아 마땅할 것이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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