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로 접어드는 9월부터 새 학기가 시작되어서인지 여름방학 동안 조용했던 골목, 골목에 노란 색깔의 스쿨버스가 심심찮게 눈에 뜨인다. 운전석 옆의 차창 밖으로 스톱싸인이 서서히 나타나면 뒤를 따르던 모든 차들은 일제히 가던 길을 멈추고 스쿨버스가 다시 움직이길 기다리는 긴 차량행렬은 등, 하교하는 학생들을 위한 일반 시민들의 배려이다.
팬데믹 이후의 세계적인 추세이긴 하나, 특히 한국에서는 이 몇 년 사이에 집값이 천정부지로 뛰어 올라 많은 사람들에게 희비쌍곡선을 그리게 한다. 특히 한때 우리가 살았던 서울 강남의 대치동이 지금은 유명한 학원가로 변모해 이름을 떨칠 줄 누가 알았으랴? 아들들이 사춘기를 지나고 몸집이 커지며 대학에 들어갈 즈음 넒은 평수의 아파트로 이사한 직후부터 대치동 일대는 재개발이란 미명아래 집값이 나날이 뛰기 시작하였다.
가끔 볼일이 있어 한국을 방문할 때면, 그곳을 지나칠 때가 있다. 하늘을 찌를 듯 재개발된 고층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고 도로 양가에는 번지르르한 상가 건물들이 줄지어 있는 이곳이 이제야 보니 내가 한때 둥지를 틀었던 서울 최고의(?) 명당 자리였음을 실감케 한다.
1980년대 초, 서울 강남 대치동에 처음 발을 밟았을 때만해도 이 지역에는 평범한 저층 아파트가 듬성듬성 보였을 뿐,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황량한 황토 벌판이었다. 근처 대모산 기슭에는 개발을 기다리는 원주민들과 외지에서 몰려온 개발 투기꾼들이 원시인들처럼 움막을 치고 비닐하우스를 급조해 여러 가지 작물을 재배하여 대모산 등산객들에게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팔곤 했었다.
때로는 계곡에서 내려오는 차갑고 깨끗한 개울물에 발을 담그고 빨래도 하며, 산등성이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쑥을 뜯어 쑥국과 쑥떡을 만들어 먹던 시골티를 벗어나지 못한 전형적인 전원도시의 모습이었다.
강북에서 강남으로 이사한 첫 날밤에 꾼 꿈은 지금도 기억 속에 또렷하게 남아있다. 아파트 뒷마당에 셀 수도 없이 많은 개미 떼가 새카맣게 땅 위를 기어 다니는 꿈이 그 당시는 전혀 가늠하지 못했던 옛 어른들이 말씀하시던 명당자리 길몽이 아니었을까?
얼마 전 한국 뉴스에서 올 여름 심하게 직격탄을 맞은 물난리가 백 여 년 만에 겪은 지구 온난화 탓이었는지 특히 강남권에 내린 폭우 소식은 1980년 말경에 난생 처음 겪었던 대치동 물난리를 떠올리게 한다.
갑자기 무릎까지 차오른 폭우로 졸지에 거리는 강이 되었고, 저층 아파트는 물론, 고층 아파트 지하까지 물이 차올라 전기와 수도까지 차단되는 전쟁 같은 물 난리였다. 당시 대통령이 수재민을 위해 집집마다 밍크담요를 한 장씩 나누어 주었었는데, 금년에 같은 장소인 대치동에서 또 물난리가 났다니…. 자연이 가져오는 반복되는 재난의 수레바퀴가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오가며 생각나게 한다.
그러고 보면,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이제는 어느 나라에서건 어느 곳을 선택해 보금자리를 정해야 하는지가 관심사로 떠오른다. 일찌감치 정착한 이곳 메릴랜드의 하워드 카운티가 미국 전역을 통틀어 부유한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 중에서 여섯 번째로 손꼽힌다는 최근 신문기사가 보도했듯이, 부자동네 6위라는 통계수치는 단순히 좋은 학군과 경제적 발전은 물론 지리적으로도 자연재해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곳에서 20년 가까이 생활하고 있는 지금 우리가 둥지를 틀고 있는 이 보금자리가 명당자리인 것을 요즈음에야 새삼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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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순 / 우드스톡,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