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저녁 밥상 자리에서 아이들과 정체성 문제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중학생과 초등학교 고학년인 필자의 장남과 차남이 자신들은 ‘미국인’이 아닌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말한 게 발단이 됐다.
미 헌법상 미국에서 태어난 너희들은 110% 미국인이라고 아무리 변호사 아빠가 설명을 해줘도 진정한 ‘미국인’은 푸른 눈을 가진 백인이라고 둘이 합세하여 우기는 통에 삼부자의 토론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오늘 칼럼에선 우리 아시안들이 얼마나 지난한 과정을 거쳐 ‘미국인’의 자격을 쟁취했는지에 대해 한번 되돌아본다.
지금으로부터 127년 전인 1895년의 샌프란시스코 이민세관. 태평양 너머 중국에서 증기선 ‘콥틱’(Coptic)에 몸을 싣고 미국으로 귀환하던 22세 웡 킴 아크(Wong Kim Ark)는 중국인 노동자의 귀화와 입국을 금지하는 ‘중국인 배척법’(Chinese Exclusion Act)에 따라 미국 땅에 들어올 수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망연자실한다.
자신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고 자란 미국인이며 4년 전 중국 방문 후 미국에 돌아올 때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애원해도 이민국 직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이민국에 구금된 이 청년은 다시 한번 ‘인신보호영장’ 제출을 통해 자신은 미국인이라며 즉각 석방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그가 미국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부모가 중국인이기 때문에 미국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외면했다.
3년이나 끌며 연방대법원까지 올라간 이 사건에서 대법원은 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부모의 국적이나 인종, 체류신분 등에 상관없이 수정헌법 제14조에 의거 미국 시민권을 가지므로 의회가 만든 중국인 배척법은 웡 킴 아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정리했다. 오늘날 미국 땅에서 태어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미국 국적을 취득하는 이른바 ‘속지주의’ 원칙은 이렇게 완성된 것이다.
아시안들의 ‘미국인’이 되기 위한 투쟁이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두 번째 사건의 주인공은 일본 가나가와현에서 1875년에 출생한 다카오 오자와(Takao Ozawa)다. 오자와는 19세 되던 1894년에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와 캘리포니아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하고 하와이에 정착, 미국 회사에서 일하며 살았다. 일본인 아내와 결혼해 아이들도 미국에서 태어났다.
이민 20년째 되던 1914년, 그는 미국 시민권 신청을 했으나 거부당하고 만다. 당시 이민법상 “자유 백인”(free white persons)과 “아프리카인이나 아프리카계” 사람들만 미국 시민권을 얻을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자와는 자기 피부가 대부분의 백인보다 더 희기 때문에 자신은 “백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만장일치로 법에 명시된 “백인”은 피부색에 상관없이 코카서스 인종이라고 정의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인도 북쪽 펀자브 지방 출신 바갓 싱 틴드(Bhagat Singh Thind)가 자신은 코카서스인인 ‘아리아’인의 핏줄을 가졌기 때문에 인종상 “백인”으로 미국 시민권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소송을 제기했다.
불과 몇 달 전 오자와 사건에서 “백인”은 코카서스인이라고 결정한 대법원은 틴드가 코카서스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백인과 ‘코카서스’ 인에 대한 정의는 “일반인의 보편적 정서에 따라 해석되어야 한다”는 궤변을 펼치며 인도인은 법에서 명시한 “백인”이 아니라고 배척했다.
아시안들은 이후에도 제2차 세계대전 중 스파이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유독 일본계 미국인들만 3년간 집단수용소에 구금당하는 등의 고통과 차별을 겪다가 1965년 이민법 개혁을 통해 비로소 평등하게 ‘미국인’이 될 자격을 얻게 되었다.
한인들도 이즈음 많이 건너와 오늘의 한인 사회 바탕을 이루었다. 우리 2세들은 제발 인종차별 겪지 않고 주류 ‘미국인’으로 당당하게 살아가길 소망한다.
<
손경락/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