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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한류의 원조

2022-09-13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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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韓流)’-. 한국인이 만든 말이 아니다. 영어로는 ‘코리안 웨이브(Korean wave)’라고 하던가. 그렇다고 다른 외래어처럼 영어권에서 들여온 것도 아니다.

‘韓’은 ‘한국’, ‘流’는 ‘흐른다’는 뜻으로, 한자의 본고장인 중국에서 생겨난 말이다. 더 정확하게는 1999년 11월2일 베이징 청년보에 처음 소개된 것으로, 한국의 대중문화와 연예인에 열광하는 중국의 젊은이들을 일컫는 신조어였다.

이후 한류는 전 세계적으로 파급, 그 파워는 영국 옥스퍼드 사전까지 파고들었다.


‘한국 식’, 혹은 ‘한국 스타일로’도 번역될 수 있는 한류란 말은 반드시 긍정적 의미만 지닌 것은 아니었다.

한국기원과 일본기원 프로기사들이 단체기전을 벌였다 하면 한국은 번번이 패했었다. 가령 5대 5 대항전의 경우 스코어는 ‘5 대 0’이 되기 일쑤였고 어쩌다가 한 판만 건지면 언론에 대서특필되곤 했었다.

이게 1980년대 이전의 한국의 바둑 수준으로 당시 일본기원에서는 행마가 둔중하거나 악수를 두면 ‘한국 바둑 두냐’는 조롱이 유행이었다.

그 한류 바둑이 세계를 놀라게 하기 시작한 건 1989년부터였다. 기전(棋戰)의 올림픽으로 불리는 응창기배 세계바둑대회가 신설되고 그 1회 대회에서 한국의 조훈현이 내로라하는 일본의 강호들을 물리치고 결승에서 중국의 녜위이핑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면서다.

조훈현은 한국이 낳은 천재기사다. 그렇지만 그의 천재성은 일본에서 개화된다. 어릴 적에 일본에 유학을 가 프로기사가 됐기 때문이다. 그러니 보기에 따라 첫 세계대회 우승을 순도 100% 한류 바둑의 개가라고 말하기에 어딘가 ‘거시기’한 면도 없지 않다.

그리고 4년 후인 1993년 상황은 일변한다. 그 해부터 바둑 한류가 세계대회를 휩쓴다.

그 첫 스타트를 서봉수가 끊었다. 스승도 없이 바둑을 홀로 깨쳤다. 당연히 일본 유학은 가지 않았다. 때문에 그의 바둑에 붙은 별명은 순 국내파란 점에서 ‘된장바둑’이다.


그 서봉수가 준결승에서 조치훈, 그리고 결승에서는 일본의 오다케 히데오를 누르고 응창기배 2기 우승을 차지했다. 그 해 세계기전에서 우승을 한 한국 기사는 서봉수 뿐만이 아니다. 조훈현, 유창혁, 이창호 등이 가세해 한국은 세계 5대 기전을 완전 평정한다.

바둑 한류가 드디어 용틀임을 하기 시작했다고 할까. 이후 응창기배 세계기전은 4기 내내 한국 기사 우승의 독무대가 되는 등 조훈현,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 4인방의 파워가 절정에 달하면서 한국바둑 시대가 펼쳐진다.

이런 가운데 한국바둑은 앞에도 없었고, 뒤에도 아마 없을 대기록을 세운다.

‘1호 순수 국내파 기사’ 서봉수가 국제 바둑대회 사상 최초의 9연승의 위업을 이룩한 것. 그 해는 1997년으로 중국 베이징에서 벌어진 제5회 진로배세계바둑 최강전에서 중국과 일본의 최강 기사 아홉 명을 홀로 모두 물리치고 우승컵을 들어 올린 것이다.

올해 칠순을 맞은 서봉수가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국내 바둑계 최정상권인 후배 기사 5명과 치수고치기 5번기에 나선 것이다. 프로기사에게 치수고치기 시합은 치명적일 수 있다. 패배해 치수가 고쳐지면 그동안 쌓아온 명성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바둑의 승부세계에서는 30세만 되도 한 물 간 선수 취급을 받는다.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바둑 한류의 원조로 왕년의 명인이다. 그렇지만 고희(古稀)를 눈앞에 둔 그로서는 세계 정상급인 20대의 젊은 후배 기사들에게는 역부족일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도전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승부결과와 관계없이 노 승부사의 투혼에 갈채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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