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놓치며 살기

2022-09-05 (월) 박명혜 / 전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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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이다보면 가을 작물은 쉽게 심을 시기를 놓치게 된다. 겨울 장마가 끝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려 심는 봄 작물과는 달리, 너무 더워서 또 아직은 수확할 것이 남아있으니 매몰차게 밭을 비우지 못해, 가을 작물은 그 시기를 놓치곤 한다. 하지만 아쉬워할 것 없다. 밭도 쉬어야 한다.

내 텃밭은 1미터짜리 틀밭(raised bed) 세 개와 부추, 파, 미나리, 돌나물이 심겨있는 화분 텃밭이 전부다. 작지만 충분한 수확을 얻을 수 있는 크기다. 물론 처음엔 욕심만 앞서 틀밭도 더 만들었고, 갖고 있는 화분마다, 작물도 종류 가리지 않고 빼곡히 심었다. 자라면서 작물들끼리 엉켜 엉망이었지만 깻잎 몇 장, 토마토 몇 알, 파 몇 뿌리의 수확이 엄청난 것 같아 마냥 뿌듯했다. 해가 지날수록 나름 내 농사 기술은 나아졌다. 하지만 수확과 정비례하진 않았다. 몇 해가 지나니 이상하게도 어설프게 씨앗 뿌려서 한 첫 해 농사만도 못했다. 거름을 주었더니 반짝 나아지는 것도 같았다. 이게 해결책인가 싶어 다음 해엔 거름을 더해 같은 작물을 똑같이 배치해 심었다. 하지만 상황은 좋지 않았다.

답은 우연히 찾게 됐다. 가뭄까지 겹친 그해, 수확도 시원치 않은 텃밭에 물을 주는 건 사치지 싶었다. 서둘러 여름작물을 모두 뽑고, 다음 해 봄에도 유혹을 물리치고 텃밭을 놀렸다. 거의 일 년 반, 밭을 쉬게 하고 새 마음으로 시작한 텃밭 농사는 성공이었다. 그렇다면 성공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밭은 비웠지만 그동안 쌀뜨물, 커피가루, 달걀껍질 등으로 땅의 힘을 길러주었기 때문일까? 물론 이런 노력도 무시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 중요했던 건 밭을 쉬게 했던 것이지 싶다.


농사법 중에 ‘연작 금지’라는 게 있다. 무슨 법령같이 들리기도 하지만 같은 땅에 같은 작물을 계속 심지 않는 이 방법은 자연의 원리를 이용해 농약 없이 해충의 피해를 줄일 수 있고, 작물이 잘 자랄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 연작에서 오는 피해를 막기 위해선 윤작(돌려짓기), 휴작(땅 쉬게 하기) 등의 방법이 있는데, 같은 땅에 심을 땐 무나 배추는 2년을, 토마토는 3년, 가지는 5년을 쉬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틀밭 세 개중 가끔 하나를 쉬게 한다. 그러면 자연스레 작물도 바꾸어 심을 수 있어 연작의 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은 땅, 텃밭의 소유주에게 땅을 놀게 하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더 나은 수확을 위해선 쉬게 하고, 타이밍을 놓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디 텃밭 농사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겠는가! 며칠 게으름으로 놓치고, 다 채우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모두 날려 버린다. 분명 더 좋은 기회는 온다.

<박명혜 / 전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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