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서울의 한 지하철 역 커피 판매대에서 커피를 주문했다. 메뉴판의 커피 이름들이 생소해서 그중 가장 만만한 아메리카노를 시켰는데 밀크도, 설탕도 없이 블랙으로 나왔다. ‘저 미안하지만 우유 좀 조금 넣어주시겠어요?’ 하고 아가씨에게 부탁했더니 아가씨는 ‘카페라떼요?’ 하고 물었다. 나는 아가씨가 다른 커피를 준다는 줄 알고 ‘그냥 여기에 우유 조금만 넣어주세요’ 하고 말했다. 그랬더니 아가씨는 짜증난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페라떼 말이에요?’하고 다시 다그쳐 물었다.
울상이 된 나는 ‘그냥 우유만 조금 넣어주세요’ 하고 사정’했다. 그랬더니 아가씨는 내 커피잔에 우유를 따라주며 ‘할아버지 이게 바로 카페 라떼란 말이에요’ 하고 참 한심하다는 듯이 핀잔을 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설탕도 조금만...’ 하고 부탁했다. 아가씨는 ‘할아버지 설탕은 없어요’하고 단호하게 내 부탁을 거절했다 ‘그럼 어쩌나 난 설탕이 필요한데’ ‘할아버지, 저기 시럽이 있으니까 타드세요’ 아가씨는 한 구석에 놓여있는 큰 병을 가리켰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설탕 대신 병에 들어있는 액체를 커피에 따라 마시면서 속으로 툴툴거렸다
‘세상에, 돈 내고 커피 사먹으면서 설탕도, 우유도 마음대로 넣어 먹을 수 없다니...아가씨가 태어나기 50여년 전부터 매일 커피를 두잔 이상 마셔온 골수 커피 드링커인 나를 커피도 모르는 무식한 촌로 취급을 하다니...’
커피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구한말 개화기 외교사절을 통해서였다. 개항 직후 외국인에 의해 인천에 세워진 대불호텔과 슈트워트 호텔에는 부속 커피숍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커피는 발음을 한자어로 옮겨 가비차(加比茶) 또는 가배차라고 불리었으며 빛깔이 진해 탕약처럼 생겼다고 양탕(洋湯)이라고도 하였다.
한국인 최초의 다방은 영화감독이던 이경손이 1927년 관훈동에 차린 ‘카카듀’ 다방이었다. 한국인들은 찻집을 ‘깃사텐’이란 일본식 이름 대신 다방(茶房)이라 불렀다. 1930년대 들어 영화, 연극인, 화가, 음악가, 문인 등 예술인들이 앞다투어 다방을 열기 시작하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커피, 설탕 등의 수입이 막혀 많은 다방이 문을 닫아야 했으며 2차대전 말기인 1945년경에는 거의 모든 다방이 폐업하였다.
8·15광복과 6·25전쟁의 혼란기를 겪으면서 다방은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로 다시 애용되기 시작하였다. 6·25전쟁 직후 전쟁으로 문화시설이 부족해지자 다방은 단순히 차를 마시고 쉬는 장소에서 벗어나 그림전시회, 문학의 밤, 음악회 등이 열리는 예술의 장소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1970년대 다방은 그 절정기를 맞아 전국적으로 3만5,000여개의 다방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진한 화장을 하고 쟁반을 들고 다니는 ‘레지’들과 카운터에 앉아 돈을 받거나 전축을 틀어주는 얼굴마담도 있었다. 대학주변의 다방에서는 커다란 유리창이 달린 좁은 방안에서 DJ 가 혀꼬부라진 목소리로 멘트를 하며 신청곡을 들려주었다.
다방은 1990년대 말부터 생기기 시작한 커피전문점에 점차 밀려나더니 지금은 서울거리에서 다방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카페 라떼’도 모른다고 내게 핀잔을 주던 젊은 아가씨는 이런 내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채수호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