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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파 잠 못 이루는 미국인들

2022-09-02 (금)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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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를 산책하다 보면 ‘참 아깝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거의 집집마다 과일나무가 있는데, 가지마다 주렁주렁 열린 오렌지나 레몬 등 과일을 따는 집이 거의 없다. 농익은 과일들은 땅에 떨어져 썩기도 하고 나무에 매달린 채 겨울을 맞기도 한다. 저 싱싱한 과일들을 왜 그냥 버리는지 … 불편한 마음이 가시지를 않는다. 마당의 과일나무는 관상용, 먹을 과일은 마켓에 가서 사는 게 미국인들의 오랜 버릇이다.

샌디에고 카운티에 사는 커미노 길슨이라는 여성도 비슷한 불편을 느꼈었다. 이웃에서 과일들이 떨어져 썩는 것을 보면 늘 마음이 언짢았다. 그러던 2009년 어느 날 그는 행동에 나섰다. 인근 마켓에서 빈 상자들을 얻어다 놓고 다음날 아침 친구들을 불러 모아 한 집으로 향했다. 그 집 뜰에서 과일을 잔뜩 따서 박스에 담아 가까운 푸드뱅크에 가져다주었다.

그것이 씨앗이 되어 자리 잡은 것이 ‘프로듀스굿(ProduceGood)’이라는 비영리단체이다. 2014년 설립된 이 단체는 농장에서 수확 후 남은 과일들, 파머스 마켓에서 팔다 남은 과일들을 따거나 모아서 무료급식소나 식량배급소를 통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준다. 현재 프로듀스굿과 손잡은 청과물 재배농부는 700명, 과일을 따고 거두는 자원봉사자는 3,500명, 이들이 제공하는 과일을 먹는 사람은 연 인원 9만명이다. 신선한 과일 구하기가 무엇보다 어려운 빈곤층이나 무숙자들에게는 여간 고마운 사업이 아닐 수 없다.


한쪽에서는 너무 많아서 버리고, 다른 쪽에서는 너무 없어서 배곯는 기현상이 미국의 현실이다. 프로듀스굿은 넘쳐나는 이 편과 없어서 못 먹는 저편에 창의적 다리 하나를 놓음으로써 모두가 만족하는 윈-윈 상황을 만들어냈다.

바이든 행정부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하는 프로젝트가 있다. 오는 28일 열리는 기아 컨퍼런스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다음 끼니를 어디서 구할지 모르는 가족들이 너무 많다”며 2030년까지 미국에서 기아를 근절하겠다고 선언했다. 식량불안 없는 미국을 만들겠다는 약속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부유한 나라, 미국에서 식량불안 문제가 심각하다. 1인당 국민소득 6만 달러가 넘는 나라에서 배고파 잠 못 드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지만 그게 현실이다. 연방 센서스국의 7월 데이터에 따르면 ‘지난 일주일간 먹을 게 부족했던 적이 있다’고 답한 성인은 2,500만명에 달한다. ‘미국에 음식을(Feeding America)’이라는 미국 최대 식량구조단체는 기아선상에 내몰린 어른아이 인구를 3,800만명으로 보고 있다.

기아는 용납될 수 없는 국가적 문제이지만 진짜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모두를 먹이고도 남을 만큼 식량이 충분한데도 굶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농장에서 가정에서 마켓에서 식당에서 … 먹지 않고 버려지는 음식양이 엄청나다. 전체 음식/식량의 거의 40%는 버려진다고 한다. 매년 버려지는 식량은 1,080억 파운드. 1,300억 끼니에 해당하는 음식이자 4,080억 달러가 넘는 가치이다. 그런 한편에서 배곯는 사람이 수천만이니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다.

‘식량불안’은 노숙자나 실직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플레가 심해지면서 직장인들이 끼니걱정에 내몰렸다. ‘도시 연구소(Urban Institute)’ 최근 조사에 의하면 직장 가진 성인들 중 ‘지난 30일 동안 식량불안을 경험했다’는 케이스가 17.3%나 된다. 열심히 일해도, 때로는 투 잡을 뛰어도, 껑충 뛰어오른 렌트비 내고, 출퇴근할 개스비 남기고, 전기료 수도요금 등 공과금 제하고 나면 식재료 구할 돈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물가가 내려가거나 봉급이 올라가야 해결될 문제인데, 어느 쪽도 가능성은 낮다.

미국정부가 기아 컨퍼런스를 여는 것은 1969년 닉슨 시대 이후 처음이다. 당시 컨퍼런스는 린든 존슨 행정부의 ‘가난과의 전쟁’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빈곤층 영양 지원 프로그램(SNAP)인 푸드 스탬프, 산모와 유아의 건강을 위한 식품지원 프로그램(WIC) 등 미국의 대표적 식품영양 프로그램들은 이때 만들어졌다.

이번 기아 컨퍼런스는 코비드-19 팬데믹 여파로 기획되었다. 팬데믹 초기 경제가 얼어붙으면서 푸드 뱅크마다 자동차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음식이 우리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 생생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아울러 당뇨, 비만, 영양실조 등 식생활 관련 질환자일수록 코비드 감염위험과 중증으로 인한 사망위험이 높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건강한 식생활을 위한 전국적 전략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생겼다.

배고픔은 절박한 고통이다. 집이 없어도 옷이 없어도 살지만 먹을 게 없으면 살 수 없다. 영양상태가 나쁘면 의사결정이나 업무 수행능력이 떨어진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한편 인종차별과 구조적 가난은 인종 간 식량불안 격차를 부추긴다. 배고픔에 내몰린 빈곤층, 특히 소수계가 가난에 발목 잡혀 가난을 대물림하는 현상은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이따금 레몬이나 오렌지를 따서 박스에 담아 길가에 내놓은 집들을 보면 반갑다. 정부, 기업, 봉사단체, 개인 -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걸 한다면 기아 근절이라는 야심찬 목표 달성도 가능할 것이다. 음식은 생명이다. 귀하게 여겨야 하겠다. 배곯는 사람이 미국에서만 3천만, 전 세계에서 8억이 넘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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