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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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여자들

2022-08-31 (수) 정숙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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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미 해군이 여군의 신체 특성을 고려한 제복의 제작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군복이 불편하다는 불만이 여군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제기돼왔는데, 이제야 여성의 신체 사이즈와 형태를 데이터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는 것이다. 3주전에는 미 육군이 창군 이래 처음으로 여군의 브래지어 제작을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미 육군 전투능력개발사령부가 ‘육군 전술 브래지어’ 시제품 4종을 개발 중이고 올가을께 도입 여부를 결정한다고 한다.

뜬금없이 여군의 제복과 브래지어라니… 라고 생각할 사람이 많겠지만 이건 그리 단순한 이슈가 아니다. 미국의 여군 비율은 16.5%, 전체 군인 6명중 1명꼴이다. 그런데 이렇게 적지 않은 숫자의 여군이 입고 있는 제복은 남체를 기준으로 디자인된 것을 사이즈만 줄인 것이고, 브래지어는 단 한 종류밖에 제공되지 않았다. 남자는 상체가 크고 여자는 하체가 크다는 사실, 젖가슴의 모양과 크기와 위치가 다양하다는 사실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의복뿐 아니라 여군은 배낭과 권총띠와 무릎 패드, 군화와 모자와 장갑 등 모두 남성 표준에 따라 만들어진 군 장비를 사용한다. 맞지 않는 장비가 초래하는 불편은 불편에서 끝나지 않고 부상을 초래할 수 있다. 한 통계에 의하면 여군은 남자와 같은 체력과 근력을 갖고 있더라도 근골격 부상을 입을 확률이 최대 7배나 된다.


이것은 여자경찰과 구급대원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2017년 영국노동조합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여성대원의 95%가 방탄복, 자상방지조끼, 형광조끼와 재킷이 모두 안 맞아서 불편했다고 보고했다. 너무 큰 방탄조끼는 경찰관을 위험하게 만든다. 몸이 제대로 가려지지 않을 뿐 아니라 권총, 수갑, 3단봉을 꺼내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1997년 한 여경은 방탄복이 불편해서 잠시 벗고 임무를 수행하다가 칼에 찔려 사망했다.

이 문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남자가 보편이고 표준이며, 여성은 특수 혹은 예외로 간주되는 세상임을 보여준다. 고대그리스 시대부터 ‘인간’은 ‘남자’를 의미했고 여자는 훼손된 남체(아리스토텔레스)였고, 미친년(플라톤)이었으며, 수수께끼(프로이트)로 간주됐다. 그 결과 여성의 권리와 지위가 상당히 개선된 21세기 현대에 와서도 디폴트(default, 표준값) 인간은 ‘몸무게 70kg의 일반남성’이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의 책 ‘보이지 않는 여자들’(Invisible Women)은 이 사실을 광범위한 통계자료와 풍부한 사례를 통해 촘촘하게 증명한다. 남성에 의해, 남성을 위해, 설계된 세계가 어떻게 인구의 반, 여성을 배제하는지를 기술과 노동, 의료, 도시계획, 경제, 정치, 재난상황 등의 수많은 영역에 걸쳐 낱낱이 폭로한다.

당신은 혹시 실내온도가 남성표준 체온에 맞춰있는 사무실에서 매일 덜덜 떨거나 옷을 껴입거나 심지어 책상 아래 히터를 틀어놓은 채 일하고 있지 않은가? 남성표준 키높이에 맞춰 설치된 거울과 선반 앞에서 자주 까치발을 해야 하지는 않는가? 여자가 열기에 너무 무거운 문, 밑에서 올려다보면 치마속이 들여다보이는 유리계단, 남자들은 한 손에 쥐지만 여자들은 자주 떨어뜨리는 아이폰에 이르기까지, 사소해보이지만 일상에서 겪는 너무 많은 문제들을 여자들은 의식도 하지 못하고 그 원인조차 정확히 모르고 살아간다.

남자와 여자의 손의 크기는 평균 4cm 이상 차이가 나는데 피아노의 표준건반은 모두 남자 손 크기에 맞춰 만들어진다. 여자 피아니스트들의 통증과 부상 확률이 남자 피아니스트에 비해 50% 이상 높다는 사실은 이 문제와 관련 있어 보인다.

남녀 모두 일상적으로 운전하는 자동차 역시 ‘남자 표준자세’에 맞춰 설계돼있다. 때문에 여자들은 운전할 때 앞으로 당겨 앉게 되므로 전면 충돌뿐 아니라 후면 충돌 때도 부상을 입을 위험이 남자보다 3배나 높다. 좌석의 등받이와 머리받침이 ‘몸무게 70kg의 일반남성’이 느끼는 충돌 강도를 견디도록 설계됐기 때문이다. 자동차 안전평가 충돌시험에서 사용되는 인형은 키 177cm, 몸무게 76kg의 남자인형이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미국의 여성 상원위원들은 전용 화장실이 없어서 방문객용 화장실을 써야 했다. ‘상원위원 전용 화장실’에서 ‘상원위원’은 남성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대형 공연장과 스포츠 센터마다 여자화장실에만 기나긴 줄이 늘어서는 이유, 모두가 아는 문제인데도 수정되지 않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건축에서 남녀 화장실에 같은 면적을 부여하라는 ‘공정한’ 설계기준이 전혀 공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의 화장실 사용시간은 남자의 2.3배라는 사실을 완전히 무시한 남성 편향적 설계 탓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1949년 출간한 ‘제2의 성’에서 이렇게 썼다. “인류는 남성이며 남자는 여자를 그 자체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비교해서 정의한다. 여자는 자율적 존재로 간주되지 않는다… 남자는 주체이자 절대아, 여자는 타자다.”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 구절이 여전히 공명한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비극적이다.

이 세상은 남자들을 위해 설계되었고, 설계되고 있다. 어쩌면 고의적인 게 아니라 수천년 이어져온 남성위주 사고방식의 산물이니 ‘무개념’이라 해야 할까. 이제 그 ‘무개념’을 ‘개념’으로 바꾸고 여성데이터 공백을 메워야한다. 여자들은 투명인간이 아니라 절반의 디폴트 인간이기 때문이다.

<정숙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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