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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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앞에 놓인 ‘중대한 과업’

2022-08-26 (금)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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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한 과업(the Great Task)에 나설 때”라고 리즈 체이니(공, 와이오밍) 연방하원의원은 말했다. 와이오밍의 예비선거일이었던 지난 16일 공화당 예선에서 무참하게 패한 후 그는 담담하게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

와이오밍은 인구 60만이 안 되는 시골 주다. 연방하원의원이 단 한명이다. 주민 대부분이 보수적 공화당 백인들인 그곳에서 체이니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는 7080년대 연방하원의원을 거쳐 아버지 부시 대통령 때 국방장관, 아들 부시 대통령 때 부통령을 역임한 딕 체이니의 딸이다. 3선에 도전했던 2년 전만 해도 그의 예선 득표율은 73%였다. 그런 그가 이번에 정치경력 전무한 해리엇 해그먼 후보에게 37%포인트 차로 패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표심을 싹 쓸어간 뭔가가 있었다. 바로 트럼프 입김이었다. 19개월 전 트럼프지지 폭도들이 연방상원의 대통령선거 인준절차를 막겠다고 의사당에 쳐들어간 사건 후 체이니는 트럼프에 반기를 들었다. 그때 미운 털이 박히면서 표심이 등을 돌렸다.


2022 중간선거 예선전이 거의 끝났다. 미 전국은 본선 모드에 돌입했다. 올해 주요선거는 연방하원 435석 전체, 연방상원 100석 중 35석, 50개 주 중 36개 주지사 선거 등. 민주 공화 어느 당이 연방 상하원의 주도권을 잡을지가 최대 관심사이지만 그 못지않게 주목을 끄는 것이 또 하나 있다. 트럼프의 영향력이다.

뜨거웠던 올여름 예비선거의 승자는 트럼프이다. 공화당 예선은 트럼프의 복수전이었다. 의회난입사건 관련, 트럼프 탄핵에 찬성한 공화당 의원은 연방하원 10명, 연방상원 7명. 트럼프는 이들을 비롯한 반대파들의 정치생명 끊기에 나섰고 상당부분 성공했다.

1월 6일 사건 직후만 해도 공화당 의원들은 민주당과 한목소리로 트럼프를 비난했다. 폭도들에 쫓기며 목숨을 위협받았던 굴욕적 경험 후 이견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공화당 유권자들 사이에서 트럼프의 인기가 여전하자 대다수가 태도를 바꾸었다. 이후 ‘선거를 도둑맞았다’ 거나 ‘대선은 사기였다’는 등 트럼프의 거짓주장들과 관련, 공화당 정치인들은 세 부류로 나뉘었다. 트럼프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적극적 아부파, 트럼프의 심기를 거스를세라 대충 눈감는 눈치파 그리고 ‘거짓주장’을 거짓이라고 지적하는 극소수의 소신파. 그런 분위기 속에서 공화당은 날로 트럼프 당으로 변신하고 있다.

내란 선동혐의로 트럼프를 탄핵하는 안에 찬성했던 하원 공화당의원 10명 중 현재까지 살아남은 의원은 단 두 명뿐이다. 4명은 은퇴를 결정했고, 4명은 공화당 예선전에서 패했다. 캘리포니아의 데이빗 발라데이오와 워싱턴의 댄 뉴하우스 의원들만이 본선 진출에 성공했는데, 이들 주에서는 당적과 무관하게 어느 후보에게나 투표 가능한 오픈 프라이머리를 진행하는 덕분이었다. 상원의 탄핵찬성 공화당 의원들 중 가장 처음 선거에 임한 알래스카의 리사 머카우스키 의원은 무사히 예선을 통과했다. 역시 오픈 프라이머리 덕분이었다.

이번 예선에서 트럼프가 지지한 공화당후보 200여명 중 많은 수가 승리했다. 상대후보가 너무 약세이거나 아예 상대가 없는 경우들도 많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트럼프의 입김이 위세를 발한 것이 사실이다. 오하이오, 펜실베니아, 애리조나, 콜로라도 등지에서는 트럼프 지지가 당선의 필수요소로 작용했다.

체이니는 의회난입사건 하원 진상조사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트럼프에게는 가장 큰 눈엣가시이다. 게다가 와이오밍은 2020 대선에서 바이든과의 격차가 43.3%포인트에 달하도록 트럼프를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그런 주에서 체이니의 공화당 예선 통과는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어려웠을 것이다.

골수 공화당 출신인 만큼 체이니도 과거에는 트럼프를 지지했다. 처음 두 번의 임기 중 트럼프와 입장을 같이한 표결이 93%에 달했다. 그러나 트럼프가 대선결과를 사기로 몰고, 의회난입을 선동해 민주적 절차를 공격함으로써 미국을 무법과 폭력의 위기로 몰아가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다고 그는 말했다.

예선 패배 직후 그는 정치조직을 새로 만들었다. 이름은 ‘중대한 과업’. 공화당의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인 링컨이 남북전쟁 중 게티스버그에서 행한 연설에 담긴 표현을 차용했다. 공화당의 본래 정신, 그 원칙과 가치로 돌아가자는 취지이다. 이 조직을 통해 그가 이루려는 목표는 트럼프가 다시는 대통령이 되지 못하도록 막는 것. 우선 이번 선거에서 트럼프 입김이 작용한 공화당 후보들의 당선을 막는 것이 첫 과업이다.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서라면 상대당인 민주당 후보를 기꺼이 돕겠다고 그는 밝혔다. 트럼프주의의 악취가 사라질 때까지 공화당은 패하고 민주당이 승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11월 8일 결선까지 70여일 남았다. 세상이 어수선할수록 바른 리더십이 필요하다. 당장의 이익보다 원칙, 당리보다 나라를 중시하는 용기있는 지도자가 누구일지 고민해봐야 하겠다. 특히 공화당은 이대로 트럼프당으로 굳어져도 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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