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시애틀지사로 전근해 첫 출근한 날 LA에서 좀체 못 본 비가 내려 환호성을 올렸다. 하지만 서너 달 뒤 고향땅 남가주의 뜨거운 햇볕이 그리워졌다. 시애틀 겨울날씨는 비 아니면 구름이었다. 이윽고 정년을 넘기고 20년 만에 LA의 땡볕으로 귀환하며 환호성을 올렸는데, 3년이 지난 요즘 간사하게도 다시 서늘하고 촉촉한 시애틀 날씨가 그립다. 남가주의 끝없는 땡볕과 가뭄이 지겹기 때문이다.
LA 귀향 후 아내와 나는 오랜 세월에 황폐해진 앞뒤 뜰 잔디밭 복원부터 도전했다. 땅을 뒤엎어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고 꽃나무로 울타리를 만드는 등 땡볕에 1년간 고생한 끝에 근사한 잔디밭이 탄생했다. 이웃들이 엄지 척을 해보였다. 손자손녀가 찾아와 파란 잔디 위에서 뒹굴며 뛰노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잔디밭이 온통 누렇다. 군데군데 맨 땅이 드러나 흙먼지가 일기도 한다.
동네 잔디밭들이 모두 황야가 됐다. 잔디 물주기가 주 2회로 제한된 탓이다. 잔디는 미국에서 물을 가장 많이 먹는 단일 재배식물이다. 농작물인 밀이나 콩보다 많이 먹는다. 나도 매달 사용한 수돗물의 최소한 4분의 3을 앞뒤 잔디밭에 퍼부은 듯하다.
가뭄피해는 서부인 남가주만이 아니다. 뉴잉글랜드·매사추세츠·코네티컷·로드아일랜드 등 동북부 주들도 지난주부터 ‘돌발가뭄’에 시달리고 있다. 또, 현재 남가주의 가뭄이 역대 최악도 아니다. LA카운티 기후통계에 따르면 금년 1~7월 LA 지역의 가뭄상황은 지난 128년 중 4번째, 지난 7월 강수량은 49번째로 각각 심했을 뿐이다.
역대 최악의 무더위가 30년 내에 닥칠 것이라는 연구보고서가 지난주 발표됐다. 기온과 습도를 감안한 체감온도가 125도(섭씨 52도)를 넘는 ‘극도의 위험’ 상황이 빈발하며 그 피해자가 현재는 800여만명에 그치지만 2053년까지 ‘극열벨트(extreme heat belt)’가 텍사스에서 5대호까지 미국 국토의 4분의1에 해당하는 광활한 지역에 형성돼 미국인구의 절반가량인 1억700여만명이 피해를 입게 된단다.
하지만 UCLA가 발표한 연구보고서는 더 겁난다.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에 비견할 수 있는 메가톤급 홍수가 남가주를 초토화시키는 게 시간문제라는 내용이다. 그래서 그 홍수가 ‘방주폭풍(ArkStorm)’으로 명명됐다. 대지진처럼 시기를 몰라 ‘또 다른 빅원(the other Big One)’으로도 불린다. 보고서는 비교적 국지적인 빅원의 피해에 비해 방주폭풍 피해는 가히 상상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보고서는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시에라네바다 산맥에 눈보다 비가 많이 내려 캘리포니아 대다수 강의 유수량이 2~4배 폭증할 것이라며 범람한 물이 오랜 가뭄으로 굳어진 땅에 흡수되지 않고 퍼져나갈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에 따라 남가주 주요 고속도로들이 대부분 붕괴되거나 유실되고 LA와 샌디에이고를 비롯한 저지대 해안 대도시들이 물에 잠겨 도시기능이 마비될 것이라고 보고서는 덧붙였다.
캘리포니아에서 이런 대홍수가 마지막으로 발생한 건 1862년이었다. 당시 북가주에 한달간 30인치의 물 폭탄이 쏟아져 샌프란시스코와 새크라멘토가 물에 잠겼다. 남가주에선 이달 초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곳 중 하나인 데스밸리 사막에 1,000년에 한번 발생할까 말까하는 메가 홍수가 기습해 관광객 1,000여명이 고립됐다.
성경 속 노아의 홍수는 40주야 쏟아진 폭우의 결과였다. 사람들이 온갖 죄악과 타락에 몰입하자 인간창조를 후회하며 격노한 신이 세상을 재창조하려고 홍수로 땅을 뒤덮었다. 지상의 모든 인간과 동물이 몰사했지만 미리 초대형 방주를 만든 의인 노아는 가족 8명과 온갖 동물의 샘플을 한쌍 씩 태우고 홍수가 빠질 때까지 표류한 후 배에서 나와 현세 인류의 조상이 됐다.
요즘 인간들의 오만과 독선에 신이 또 격노했는지 가뭄과 홍수가 혼재한다. 한국에 시간당 141mm 물 폭탄이 떨어졌는데 중국에선 양쯔강이 바닥을 드러냈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원숭이 두창 같은 희한한 온역이 만연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더욱 거세지고 아프리카에선 어린이 5,900여만명이 굶주린다. 모두 성경이 말하는 말세의 징조들이다. 공들인 잔디밭이 나무아미타불 된 건 꿍얼댈 일도 못된다.
<
윤여춘 전 시애틀 고문>